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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폴 고갱, 나는 자연인이다 찍을 수 밖에 없던 이유

by 아옹츄 2023. 4.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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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고갱

본명 외젠 앙리 폴 고갱 Eugène Henry Paul Gauguin 은 후기 인상파 화가로

1848년 6월 7일, 프랑스의 파리에서 태어났습니다.

 

폴의 아버지인 클로비스 고갱은 오를레앙에서 이주해온 사업가 출신의

자유주의 언론인으로 활동했습니다

 

당시 유럽은 1848년 혁명이 한창이었는데

클로비스 고갱은 신문에 낸 기고문 때문에 프랑스로부터 추방령을 받았습니다.

 

더이상 프랑스에서 살 수 없게 된 고갱의 아버지 클로비스는

가족들을 데리고 페루 여행길에 오르게 됩니다

하지만 여행길에 오름과 동시에 심장마비로 급사하게 되고

페루에는 결국 고갱의 어머니와 고갱 그리고 고갱의 누나인 마리만이 도착을 하게 됩니다

다행스럽게도 페루에 있던 어머니의 외종조부는 페루 내에서 차기 대통령이 확실시 되어있던

여유로웠던 사람이었고 고갱의 가족들을 환대 합니다

 

하지만 이 여유로움은 훗날 이들의 후견자 역할을 자처했던 외종조부의 사망으로 

고갱의 가족은 더이상 페루에 살 수 없는 처지가 되어버립니다

고갱의 어머니인 알린은 두 아이들을 데리고

남편의 조부인 기욤고갱이 사는오를레앙으로 거처를 옮깁니다.

 

 

알린 마리 샤잘 트리스탕 <화가의 어머니> 1889

 

하지만, 오를레앙은 고갱 어머니인 알린 마리 샤잘 트리스탕의 배다른 형제인

트리스탕 모스코소 가족이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하던 곳이었고

고갱의 가족은 그들의 괴롭힘에서 벗어나기 위해 다시 파리로 돌아가게 됩니다

어머니 알린은 삯바느질 일을 하면서 힘들게 생계를 유지합니다

 

고갱은 학교를 두번정도 옮겨다니다가 해군예비학교에 입학,

졸업후에프랑스 해군에 입대해 2년정도 복무기간을 가집니다

도선사 생활을 3년정도 하기도 했습니다

견습 도선사로서 여러 항구를 돌아다니며 보고 들은 새로운 문물들은

훗날 고갱의 예술세계에 큰 영감을 주었습니다.

 

 

어느날 고갱의 어머니가 돌아가시게 되면서

고갱은 선원생활을 접고 파리로 돌아와 증권회사에 입사를 합니다

고갱은 증권회사에 입사한 후 자주가던 카페에서

인상파 화가들과 친분을 쌓고, 자주 어울리기도 했습니다.

 

그곳에서 함께 시간을 보냈던 사람 중 하나가 바로 카미유 피사로 인데

고갱은 주말에 종종 피사로의 채소밭을 찾아가 그림을 그리기도 했습니다

취미로 시작한 그림에 흥미가 깊어지자 고갱은 비교적 집값이 저렴한 동네로 이사를 가

화실이 딸려있는 집을 구매하고, 이사합니다

보라르 라는 동네에서 전 증권 중계인으로 활동하다가

화가로 전업을 한 에밀 슈페네커와 만나게 되어

고갱과 에밀 슈페네커는 친분을 쌓아갑니다.

 

 

보기라르의 채소밭 1879 / 고갱 작품

 

<보기라르의 채소밭> 이라는 작품을 인상파 전시회에 출품하기 까지 이르는데

당시 인상파 전시회에서의 작품평엔 악평이 주를 이뤘다고 합니다

 

그렇게 자신이 좋아하는 취미인 그림을 그리는 취미와

증권가에서 나름 성공한 중개인이 되어 이름을 날리며 11년 가량을 근무하던 고갱은

파리 증권시장이 붕괴하던 1882년, 더이상 증권거래로 돈을 벌 수 없게 되었고

취미 생활로 즐겼던 그림을 본격적으로 전업삼아 화가 생활을 하겠노라 마음을 먹습니다.

 

 

고갱 부인의 초상 / 1880

 

하지만 주식시장의 붕괴는 미술업계까지 역시 위축시키게 됩니다

고갱은 당장 큰 돈을 벌진 못했지만 아트딜러였던 미술계의 크손 폴 뒤랑 루엘과

전속 계약을 맺으며 천천히 미술계에서 자신의 인지도를 쌓아 올려갑니다

 

이 시기에 덴마크 출신의 메테 소피 가드와 결혼해 슬하에 다섯명의 자녀를 두고 잘 지내오던 

고갱 부부는 고갱이 전업화가가 되면서 결혼생활의 위기를 맞이합니다

증권 중개인으로 잘나가던 고갱이 돈을 제대로 벌어오지 못하자

고갱의 아내는 고갱에게 결혼생활의 끝을 고하며 자녀들을 데리고 코펜하겐으로 떠납니다

어떻게든 성공을 해보려 몸부림치던 고갱도 아내와 아이들을 따라

결국에는 코펜하겐으로 갔지만, 쉽지 않았던 삶에 1년만에 고갱은 파리로 돌아갈 결심을 합니다.

 

 

La famille du peintre au jardin, rue Carcel 1881 정원의 인물

 

 

고갱이 여섯살짜리 아들 클로비스를 키우고 다른 자녀들은 와이프 메테가 코펜하겐에서 키웠습니다

아들 클로비스와 함께 프랑스로 돌아갔지만, 고갱에 대한 프랑스 미술계는 냉담했습니다

추운 겨울, 고갱은 허드레 일들을 하면서 아들을 키우며 지독한 가난에 시달리게 됩니다

게다가 클로비스가 병을 앓게 되기까지 하자 

고갱은 일년에 겨우 몇점을 그려낼 수 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고갱은 자신의 누나에게 경제적 도움을 요청하고, 누나의 돈으로 아들을 기숙학교에 입학 시킵니다

 

그 후 고갱은 인상파 전람회에 자신이 기존에 그려두었던 

<목욕하는 여인> 작품에 채색을 해서 출품을 합니다.

 

 

목욕하는 여인들 1885

 

하지만 이 시기에 점묘법으로 그린 조르주 쇠라의 그랑드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 라는 작품이

인상파 업계 쪽에서 그야말로 빵! 뜨면서 모든 이목은 조르주 쇠라에게 단번에 쏠리게 되고

떠오르는 아티스트로 각광받자 고갱은 쇠라의 점을 찍어 그리는 점묘법을

저주받은 점 이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충분히 주목받을 수 있을거라 생각했던 미술계에서도

잔잔한 존재감으로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고갱은 유럽을 떠나 자신의 매형이 근무하던 파나마로 떠납니다

고갱의 매형은 당시 파나마 운하를 건설하던 현장직에 근무했는데, 파나마 운하 공사는 망해가고 있었고

이때문에 매형이 망하게 되자 자신을 챙길 수 없던 매형을 떠나 

친구인 찰스 라발과 함께 마르티니크 섬으로 떠납니다

이 마르티니크 생피에르에서 에서 몇달동안 머물면서 자신의 제대로 된 화풍을 찾기에 몰두하는데

섬 원주민들의 움막을 들락거리면서 사람을 관찰하고

 

숲 속의 움막 1887

 

망고에 둘러 쌓여 1887

 

한량처럼 뒹굴거렸으며,

마르티니크에 정착해서 사는 인도인들이 믿는 힌두교 상징에 관심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별다른 성과가 없을것 같았지만

마르티니크 섬에서 고갱은 드디어 자신의 스타일을 찾기에 성공합니다

 

확실한 윤곽선, 음영과 그림자가 없는 평평한 색면, 강렬한 색채이며

문명을 멀리하면서도 자연속의 모습과 원시의 모습을 사랑한 고갱 그림의 특징은

이때부터 시작됩니다.

 

마르티니크에서 자신만의 확고한 그림스타일을 적립하고 돌아온 고갱은

반 고흐의 초대로 아를에 있는 고흐의 집에 가 고흐를 만나게 됩니다

고흐는 고갱을 동경해 고갱을 스승으로 모시며 아를에 초대했고

고흐의 집에 머물면서 둘은 협업을 하지만, 두 사람의 예술관의 차이 때문에

둘은 불화가 심해졌고, 결국 둘은 작업을 그만두고 찢어지게 됩니다.

이후 고갱은 부르타뉴로 돌아가 걸작을 만들어 내는데,

 

그 걸작이 바로 <황색의 그리스도> 입니다.

 

 

황색의 그리스도 1889

 

 

 

섬에 가서 작품을 그릴때마다 영감이 미친듯이 솟아나고, 걸작이 나와서였을까요?

 

고갱은 또 다시 유럽을 떠나 어딘가로 떠날 준비를 합니다

수중에 가진 돈을 탈탈털어 타히티로 떠나게 되는데

고갱이 희망에 부풀어 타이티에 도착했을땐, 고갱의 상상속 타히티와는 사뭇 달랐습니다.

 

 

해변의 타히티 여인들 1891

 

원주민들이 존재하고 그 자연안에서 영감을 얻어 작품을 만들겠다는 고갱의 야무진 계획과는 달리

타히티는 이미 프랑스의 식민지로 있으면서 선진 문물이 들어와 문명화과 되어있었고

타히티의 로컬들은 고갱에 대해 밍숭맹숭한 태도였다고 합니다

고갱이 그린 <파레오를 입은 원주민 여성들> 의 그림속 표정인 밍숭맹숭한 누룽지 같은 표정도

그때문이었을거라 예상됩니다.

 

하지만 역시나 타히티에서도 고갱은 자신만의 스타일을 굳히는데 성공했고

금의환향 하는것처럼 프랑스로 돌아갔지만

프랑스 대중의 반응은 물음표 그자체였습니다

고갱그림의 제목에 붙여진 타히티어도 프랑스인들의 관점에서는

뭔가 유치하면서 허세섞인 느낌이었다고 합니다

 

지금의 고갱을 대표하는 고갱의 대작인

 

우리는 어디서 왔고, 우리는 무엇이며,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1897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의 그림 테두리가

바로크나 르네상스 시대의 작품처럼 금 테두리를 두르고 있는것도 허세로 치부할정도로

고갱 그림에 대한 반응은 냉담했던것입니다.

프랑스 내의 반응이 냉담하자 상심한 고갱은 다시 타히티로 발걸음을 돌리게 됩니다

전업 화가였기에 고갱이 생활하는데 필요한 돈들은 그림을 팔지 않으면 얻을 수 없는 구조였음에도

고갱은 경제관념이 부족했고, 잦은 생활고에 시달렸다고 합니다.

 

훗날 고갱은 문명의 손길이 덜 닿은 곳인, 마르키즈 제도의 히바오아로 옮겨가기도 했지만

히바오아의 카톨릭 주교와 싸움을 하게 되고, 현지인의 삶을 대변한다며 총독을 비난하는 등

사고를 일으키고 돌아다니기만 했습니다.

 

돼지와 말이 있는 풍경 (히바오아) 1903

 

바람잘날 없던 고갱의 삶은 점점 알코올에 의존하게 되고, 매독과 유사한 통증을 호소하던 고갱은

1903년 히바오아에서 생을 마무리하게 됩니다.

 

고갱의 사후, 고갱의 그림에 대한 인정과 가치를 존중받았고

2017년엔 프랑스의 영화 <고갱> 에서는 뱅상 카셀 이 폴 고갱의 역할을 맡기도 하며

프랑스 뿐만 아니라 전세계 적으로 미술을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고갱의 그림은

빼놓을 수 없는 미술계의 유산으로 남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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