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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프란시스코 고야, 인간 환멸과 전쟁의 공포를 그린 스페인 화가

by 아옹츄 2023. 3.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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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초의 스페인의 대표적인 화가 프란시스코 고야는

현대 미술사에서 큰 역할을 했던 인물 입니다.

18세기 말 부터 19세기 초에 이르는 화가이며, 바로크와 로코코 양식으로 유명해졌습니다

 

고야는 다양한 장르의 작품을 창작해 스페인 미술사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고야의 작품은 불안정한 시대의 혼란스러운 분위기를 그대로 담아내어

당시의 사회적 상황과, 정치적인 상황들을 잘 반영하고 있습니다.

고야는 주로 역사화, 포트레이트, 신화, 실내장식 등을 그렸습니다.

 

프란시스코 고야의 작품과 그의 인생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프린시스코 고야는

1746년 스페인의 아라곤지방 푸엔데토도스에서 

빈농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고야의 아버지인 호세베니토 데 고야 이 프랑크는 도금을 하는 도금업자였고

와이프에 집에 얹혀 살았습니다.

 

가난한 그의 집이 돈을 마련해 

사라고사 라는 곳에 집을 마련했고,

고야는 마르틴 사파테르와 막역한 사이였던 에스쿠엘라스 피아스의 학교에 다니게 됩니다.

고야는 어린시절부터 뛰어난 재능을 보였고, 

14세가 되던 해에 화가 호세루산의 도제로 들어가게 됩니다.

 

1765년 마드리드로 간 고야는 렘브란트와 벨라스케스의 작품에 감동을 받습니다

훗날 고야는 마드리드로 거처를 옮기고, 당대의 유명한 궁정화가였던

안톤 라파엘 멩스의 제자로 들어가게 됩니다.

안톤 라파엘 멩스의 제자로 들어가게 되었지만,

고야는 스승과의 불화로 끝내 졸업을 하지 못하게 됩니다.

훗날 왕립 미술 학회에 입학신청서를 제출하였으나

모두 거절당하게 됩니다.

 

마드리드에서의 힘든 경험 때문일까요?
고야는 이탈리아로 여행을 떠나게 됩니다. 여행을 떠난 이탈리아에서 참가한

파르마의 회화전에서 덜컥 2등을 수상하게 됩니다.

그해 말, 고야는 사라고사로 돌아가 충전된 에너지로

필라 성모 대성당 소속의 화가로 임명 받습니다.

이곳에서 고야는 프란시스코 베이유 이 수비아스와 함께 작업을 하게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고야의 뛰어난 색감은 입소문을 타고 유명해지기 시작합니다.

 

1773년, 고야는 베이유의 여동생인 호세파와 결혼을 하게 됩니다

결혼 후, 왕립미술학회의 회원으로 있던 베이유의 도움을 받아

엘에스코리알, 엘파드로궁전의 테피스트리에 참여해

5년에 걸쳐 42개의 패턴을 제작하게 됩니다.

 

El Escorial (엘 에스 코리알) :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어 있습니다.

 

고야는 이 작업을 통해 본격적으로 왕가의 주목을 받았고

성프란시스코 성당의 제단화를 그려 실력을 인정 받은 뒤에 

본격적으로 왕실미술학회의 회원이 됩니다.

 

 

 

 

이후 고야는 왕가의 초상화를 그리기 시작합니다

1800년에 그린 작품인 <카를로스 4세의 가족> 이 유명합니다.

 

1800-1801 카를로스 4세의 가족

 

 

이 외에도 고야는 궁정화가로 왕, 왕후등 왕족과 귀족의 초상화를 그렸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고야는 콜레라에 걸리게 되는데 콜레라로 인한 고열로 인해

청각을 잃게 됩니다.

5년뒤, 회복하기까지 고야는 깊은 상실감과 좌절감을 맛보았습니다.

계속해서 머리를 울리는 소음들과 들리던 것들이 들리지 않는 상실감에 잠겨

신경쇠약까지 걸리게 됩니다.

 

이 기간동안에 고야는 프랑스대혁명의 이상에 이끌리게 되는데

이로 인해 관련된 모든 철학책들을 탐독하는 광기를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1799년 고야는 에칭의 일종인 애쿼틴트 기법으로 제작한

판화집인 <카프리초스> (변덕) 이라는 작품을 발표 합니다.

82개의 판화들이 묶여있는 <카프리초스> 는 

마치 악몽을 꾸는 듯 하면서도, 환상적인 작품들을 만들어 냅니다.

 

 

카프리초스에서 고야는 성직자들을 악마와 괴물로 표현을 했고

마녀와 악마에 대해 미신에 사로잡힌 스페인의 부패한 카톨릭 교회의 실상을

풍자하며 어두운 실상을 고발했습니다

 

 

이 판화집은 '카툰의 시초' 로 평가 받기도 합니다.

어두운 분위기의 판화들로만 꽉꽉 담아 채워진 이 판화집에 고야는 부제를 붙여주었습니다.

 

"이성이 잠들면 괴물이 깨어난다"

 

 

또한 고야는 일상생활을 그려낸 사실적 풍속화를 많이 그렸는데

그 중에서도 초상화 <옷 입은 마하> <벌거벗은 마하> 등 마하 연작을 그려냅니다.

1800년에는 <옷 벗은 마하> 를 그렸고

1800년 옷 벗은 마하

 

 

1803년에는 같은 포즈를 한 <옷 입은 마하> 를 그렸습니다.

 

1803년 옷 입은 마하

 

 

이 마하 연작 시리즈는 현실에서 볼 수 있는 현실적인 여인을 그려낸

서양 최초의 등신대 여성 누드 로 평가를 받습니다

옷 벗은 마하 그림은 신성모독 논란이 붉어졌고,

동시에 고야는 마하 그림에 옷을 그리라는 압박을 받게 됩니다.

하지만 고야는 옷 벗은 마하 그림에 옷을 새로 그려넣는것을 거절하고

<옷입은 마하> 를 새로 그렸습니다

 

그림의 모델이 되는 여성이 누군지는 명확히 밝혀지진 않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마하의 주인공으로 알바 여공을 뽑긴 했지만

그림을 그린 고야는 아니라고 부정했다고 합니다.

모델이 누군지에 대해 많은 설이 있지만 

마하는 어떤 여성을 보고 그린것이 아니라,

그저 이상화를 시켜놓은 여성으로 보는게 좋겠습니다.

 

현재 이 마하 연작은 스페인의 프라도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이후 1808년에서 1814년까지 프랑스와 스페인간에 반도전쟁이 일어납니다.

 

 

El dos de mayo de 1808 en madrid

 

이때 고야는 반도전쟁에 관한 여러 기록화를 남기게 되는데

 

1808년 5월2일, 3일의 사건을 그린 <1808년 5월2일>과

<1808년 5월 3일의 처형>  이 그 기록화 입니다. 

 

프랑스 대혁명의 지지자이자 덕후였지만, 고야 자신의 조국인 스페인을 침략한

프랑스군의 만행을 사실 그대로 묘사했습니다.

나폴레옹이 자신의 동생을 왕위에 앉히고 이에 분노한 시민들이 시위를 일으키자

무력과 폭력으로 시민들을 진압하는 프랑스군의 모습입니다.

 

1808년 5월 3일의 처형

 

 

고야는 전쟁 중 스페인에서 일어난 프랑스군의 비인도적 만행을 판화집에 기록을 했습니다.

1810~1820년 까지 제작한 <전쟁의 재난> 이 바로 그 기록물 입니다.

참혹스러운 반도전쟁의 학살과 죽음의 공포와 전쟁의 참상을 그림을 통해 고발했고

 

프랑스 군 뿐만 아니라, 프랑스 군에 협조한 자국민이 자국민에게 벌인

끔찍한 만행들 또한 그림속에 기록했습니다.

 

 

Los Desastres de la Guerra (전쟁의 재난)

 

이후 프랑스군이 스페인에서 물러나고

페르난도 7세가 다시금 왕위에 복귀를 하게 되었지만, 고야는 왕궁으로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이미 많은 고발그림을 그렸던 고야는 신임을 잃은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1812년에 고야의 아내인 호세파가 사망을 하게 되고

고야는 만나사레스 지역의 근처에 외딴 집을 구해서 세상과 떨어져 지내며 

검은 그림 들을 제작하기 시작합니다.

 

이 집은 퀸타 델 소르도 (Qeinta del sordo: 귀머거리의 집) 이라는 이름이 붙었습니다.

 

이 집에서 그린 검은그림 연작들은

전쟁의 광기가 그대로 담겨있고, 이성이라는 이름 뒤에 가리워진 광기들에 대해

리얼하게 표현하였습니다. 이 밖에도 고통, 인간의 악날함과 사악함, 공포 등과

어둡고 우울함을 캔버스에 그대로 담아냈습니다.

 

이전에 왕궁에서 화가로 있을때 그렸던 밝고 화사한 색채와는 

정반대의 화풍으로 그림을 그린것입니다.

궁정화가의 지위를 잃고, 청각을 잃고, 전쟁을 겪고, 아내를 먼저 보내는 등

일련의 고통스러운 사건들을 겪으면서 인간에 대한 환멸과

인간 내면에 존재하는 어두움과 우울함을 그림속에 담아낸게 아닐까 싶습니다.

 

 

검은 그림 연작들 중에서는 <아들을 먹어치우는 사투르누스> 가 유명합니다.

 

 

1819-1823 83*146 아들을 먹어치우는 사투르누스

 

공황에 빠진 눈빛으로 아버지가 자식을 잡아 먹는 이 끔찍한 그림에는 많은 의미가 담겨 있는데

 

자식을 자꾸 죽이는 아버지에 분노한 크로노스는

아버지인 우라노스의 생식기를 잘라버리는데요, 아버지의 생식기를 자르는 순간 

아버지인 우라노스는 크로노스에게 너 또 한 네 자식 손에 죽을 것이라는 저주를 내립니다

이 얘기에 평생 두려움을 느낀 크로노스는 자식이 생기면 잡아먹고, 잡아먹고를 반복합니다

 

자식을 잡아먹은 이유에는 자식의 손에 운명을 달리하기 두려워던 이유도 있지만

시간의 속성 때문도 있는데요

 

창조되어있는 모든 생명체는 시간이 흐르면 죽음을 맞이하고, 사라져 버리게 되는데

시간은 자신이 만든 모든것을 삼키고 마지막을 맞이하게 만들어버린다는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고야는 아버지가 자신이 만든 자식을 잡아 먹는 끔찍하고도 소름끼치는 순간을

그림으로 그려냈습니다.

 

또 다른 의미로는, 나폴레옹이 이끄는 프랑스군대가 스페인을 쳐들어 오고,

그 이후 나폴레옹의 군대가 쇠퇴한 이후에도 국왕인 페르난도 7세는

폭군정치를 이어가게 됩니다. 

이를 표현하기 위해 사투르누스를 소재로 이용했다고 합니다.

 

지금은 복원이 되어 스페인 마드리드의 프라도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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