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예술

앤디워홀, 그의 미친 스타성과 팝아트계의 슈퍼스타라 불리는 이유

by 아옹츄 2022. 11. 9.
반응형

 

"돈을 버는 것도 예술이고, 일을 하는 것도 예술이고, 성공적인 사업은
최고의 예술입니다"  - 앤디 워홀

 

 

 


미국의 미술가 앤디 워홀은 우리나라에서 팝 아트로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사실 그는, 산업 일러스트로 경력을 채운 뒤
그 후에 화가와 영화, 프로듀서, 작가로 유명해졌습니다.

앤디 워홀은 미국의 펜실베이니아 피츠버그에서 1920년도에 태어났습니다
체코의 이민자 출신 가정에서 자란 앤디 워홀의 아버지는 노동직에 종사하다
앤디 워홀이 열네살이 되던 해에 사망하였습니다.


교육열이 높았던 앤디 워홀의 어머니는 앤디 워홀의 재능을 살릴 수 있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고 합니다. 앤디 워홀의 어머니 역시 예술적인 재능이 뛰어나
그림책을 만들어 팔기도 하고, 집 안에 있는 물건들을 업사이클링해서
판매하기도 하는데 어릴 적부터 이런 모습을 보고 자란 앤디 워홀은
예술로 돈을 벌 수 있다는 것을 일찍이 알고 있었습니다.

앤디 워홀은 자라서 카네기멜론대학교에서 디자인을 전공하게 됩니다.
이후 졸업하여 뉴욕시로 이사하게 되는데
앤드류 워홀라 라는 이름을 미국식 이름인 앤디 워홀로 바꾸고 시작하게 됩니다.

 

 


광고계에 들어서게 되며 

그의 센스 넘치는 광고 제작으로 인지도를 높이게 됩니다.
그 후 앤디 워홀은 일러스트레이터로서도 이름을 알리게 되는데
하퍼스 바자나 보그 등의 잡지 등의 일러스트를 그리게 되며 
상업적인 일러스트레이터로서의 성공 가도를 달리게 되는데
늘 순수 미술계에 목이 말라 있던 앤디 워홀은 그 후 일러스트레이터를 접고 
미술계로 발을 들이게 됩니다.

실크스크린 기법을 사용하여 자기 작업물에 사용했는데 
미국 내 대중적인 음식이었던 캠벨 수프의 캔이나 코카콜라 등의 상품을
실크스크린 기법을 사용해 작품의 대량 생산화를 이루어 냅니다.

 


실크 스크린 프린트를 이용하여 

기계로 작품을 찍어내듯 만들어내는데
공장처럼 작품을 만들어 내기 시작하면서 앤디 워홀은
아트 워커, 일명 예술 노동자 들을 고용하여 작품들을 제작해 냅니다.


맨해튼 47번가에 랜트한 앤디 워홀의 예술공장은 스튜디오가 아닌
팩토리 (공장) 로 불리게 됩니다.
이 팩토리 내부를 은박지로 감싸고, 은색 페인트로 칠한 워홀의 취향을 담아냅니다.
많은 사람을 초대하고, 파티하기도 하고, 공연하기도 하고
사교 모임을 하기도 하는 장소로 사용이 됩니다.

 

 


앤디 워홀은 영화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며 직접 제작하기도 합니다.
자신의 애인이 자는 모습을 찍는다거나, 

불이 켜진 엠파이어 빌딩을 찍는다거나
일상생활에서의 모습들을 담아내 영화화하기도 합니다.
앤디 워홀 본인은 영화에 굉장한 욕심이 있었지만
영화는 대중적이지 못하고 실험적이었던 탓에 성공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던 중 팩토리 스튜디오의 직원으로 있었던 밸러니 솔라나스가 
앤디 워홀의 스튜디오에서 앤디 워홀을 저격하는 사건이 발생하게 됩니다.
자신이 쓴 각본을 영화로 제작해 보는 것이 어떠하겠냐며 
앤디 워홀에게 대본을 주는데, 

앤디 워홀은 대본만 받고 영화로 제작하지는 않습니다.

 

영화로 제작되지 않자 자신의 대본을 돌려달라고 말한 솔라니스에게
어딘가에 둔 대본을 찾지 못해서 주지 못한 앤디 워홀은 
솔라니스에게 총을 맞게 되는데, 

두발은 빗나가게 되고 세 번째 쏜 총알이 앤디 워홀을
관통하게 되면서 병원으로 옮기게 되는데, 

의사들 모두가 앤디 워홀이 죽을 거라고 예측했지만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지게 됩니다. 


하지만 이후 앤디 워홀은 

의료용 보호대를 평생 차고 살아야 하는 장애를 겪게 됩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앤디 워홀의 작품 활동에도 많은 데미지를 받게 됩니다.
하지만 시대의 아이콘이었던 앤디 워홀이 죽을 뻔하여 보이자
시중에 풀려있던 앤디 워홀 작품들의 가격은 어마어마하게 뛰어오르게 됩니다.
미국 내 경매에서 당시 살아있는 작가들의 작품 중 가장 높은 가격에
팔리기도 하게 됩니다.

앤디 워홀은 사교계 인사들과도 친분이 두터웠는데, 

이들로부터 다수의 제작 의뢰를 받아
사교계 인사들의 인물을 실크 스크린 제작해 주기도 합니다.

제작 의뢰를 받아 그려주기도 했지만, 앤디 워홀 본인이 직접 
초상화를 그려볼 생각이 없는지 의사를 확인해 계약을 따내는 영업활동도
스스로 했다고 전해집니다. 

 

데이비드 호크니나 리히텐슈타인의 초상화 작업도 진행했습니다.
또한 앤디 워홀은 INTERVIEW라는 잡지를 발행하기도 합니다.
초기에는 앤디 워홀의 인터뷰라는 잡지였지만, 
후에 앤디 워홀을 빼고 INTERVIEW라는 상호로서 오늘날까지 발행이 되고 있습니다.
앤디 워홀의 작품의 대부분은 미국의 상업과 물질적인 문화를 담아내고 있습니다
식품과 유명인 달러 기호와 돈 그리고 신문 스크랩을 그렸습니다


많은 이들에게 익숙한 이미지로 그림을 그린 그는 
당시 미국 문화의 아이덴티티를 그려내는 일을 했던 것입니다.
그는 대중예술과 순수예술의 경계를 허물며 많은 이들의 열광을 받았습니다.
예민하고 내성적인 성격의 어린 시절 앤디 워홀은
사업적인 부분에 있어서는 유독 적극적이고 대범했다고 전해집니다.
많은 사람과 교류하고 비즈니스를 하고, 영업했던 앤디 워홀의 모습 속에서
그가 비즈니스와 사업에 얼마나 진심이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앤디 워홀은 1987년에 최후의 만찬 전시를 끝내고 지인들과
일본식 식당에서 식사를 마친 뒤에 배가 아파서 병원을 찾게 됩니다. 

병원에서 쓸개에 문제가 있다는 얘기를 전해 듣고 

앤디 워홀은 쓸개를 제거하는 수술을 받게 되는데,
수술 후 호전되는 듯하였으나 갑작스럽게 악화가 된 앤디 워홀은 
사망하게 됩니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