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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가난한 환경에서도 꽃 피운 예술 혼, 황소 그림 이중섭

by 아옹츄 2022. 11.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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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빈센트 반 고흐로 불리는 

이중섭 그림의 비밀

 


강렬한 색채와 거친 붓 선으로 

한국을 대표하는 그림을 그려낸 

근현대 미술을 대표하는 작가

 

가장 유명한 소 그림은 교과서에 등장할 정도로 유명합니다

소는 이중섭 그림의 단골 소재이자 

상징이기도 합니다

이중섭은 부농의 막내아들로

평안남도에서 태어납니다.

이중섭의 외가는 부자여서

아버지의 부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린 시절을 유복하게 보내게 됩니다

그는 평양의 학교를 졸업 후에 

고등학교를 오산학교로 진학하게 됩니다.

 


오산학교의 미술 선생님으로 재직 중이던 

임용련 선생님을 만나게 되는데

학창 시절 3.1운동에 참여했다가 

수배령이 내려진 임용련 선생님은

가짜 중국 여권을 만들어 미국 시카고로 넘어가

예일대에서 드로잉과 유화를 전공하고, 

유럽에 유학까지 다녀온

그 당시에는 상상할 수 없는 스펙으로 

서양화의 선구자와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멋진 스승의 밑에서 가르침을 받으며 

이중섭은 많은 연습과 가르침을 받게 되었습니다.


서양화를 배웠고 유럽에서 유학 생활을 했던 

스승이었지만, 임용련 선생은 

 

"조선 사람은 조선의 화풍으로 그려야만 한다"

 

는 연설을 듣고 

스승에게 깊이 감동하였다고 합니다.

 

훗날 일제강점기임에도 불구하고 

한국적인 화풍을 추구하고, 

그림의 낙관도 한글로 남긴 영향이

바로 스승님의 가르침에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전해집니다.

또한 많은 연습과 습작을 통해 발전해야 한다는 

스승의 가르침을 따라

 

이중섭은 많은 습작을 남기게 되는데 

이때 이중섭의 습작 소재로 쓰이게 되는 게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어린이, 가족, 소, 닭과 같은 소재들이 있습니다.

 

 

 

 

 


이중섭은 소를 보면 마음의 평화가 찾아오고, 

소에게서 순수한 조선의 냄새가 나서

소를 좋아한다고 했습니다. 

이중섭에게 소는 그리면서 

마음의 평화를 찾게 되는 대상이었습니다.

 


스승의 지도 아래 

오산학교에서 민족교육을 받은 이중섭은

본격적으로 미술계에 들어서게 됩니다

일본에서 개최된 미술전에 작품을 제출하게 됩니다.

 

당시 일본인들이 한국을 떠올리면 

가장 먼저 떠올리는 게 황소일 정도로 

한국을 대표하는 이미지가 황소였기에 

 

일본인들이 일부러 황소를 그리지 못하게 할 정도의

보수적이고 억압적인 분위기인 가운데 

이중섭은 보란 듯이 황소를 그려서 

작품을 제출하게 됩니다.

 

 

이중섭의 싸우는 소 1950년대

 


이중섭은 그림을 더 깊이 있게 배우고, 그리기 위해서 

일본 유학길에 오르게 됩니다

도쿄 유학 생활 뒤에 이중섭 그림의 

선은 더욱더 짙어지고,더욱더 강렬해지고 간결하지만 

힘이 있는 느낌으로 변하게 됩니다.

 

1943년 일본의 공모전에 <망월> 작품을 출품하여

상을 받게 된 이중섭은

달을 바라보는 소와 소년을 통해 

조국의 비운을 그리며 그 안에 희망도 녹여냅니다

유학을 마무리하고 이중섭은 

자기 고향인 평안남도 평원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유학 시절에 만난 일본인 

야마모토 마사코와 결혼하게 됩니다

결혼 후 병으로 첫째 아이가 죽자 

이중섭은 이 이후로 아이들의 그림을 그리게 됩니다.

 

가난한 삶을 살았지만 

어렵게 가정을 꾸려가던 이중섭에게 

연이어 안 좋은 일이 닥치게 됩니다

바로 6.25 한국 전쟁이 일어난 것입니다.

전쟁으로 가진 모든 것을 잃은 이중섭은

부산으로 피난했고, 허드렛일하며 

가난을 이겨내던 이중섭은 제주도로 떠납니다.

 

 

 

1951년 작품 이중섭의 <서귀포의 환상>

 

 

바닷가에 나가 그림을 그리고 

휴식을 취하며 안정을 찾아가게 됩니다.

이 시점에 이중섭이 그린 제주의 그림은 

참으로 따뜻하고 아름답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내가 폐결핵으로 고생하고 장인어른이 돌아가시며
아내와 아들을 일본으로 보낸 이중섭은 
그림 그릴 재료 살 돈도 없이 

힘든 생활고를 겪게 되지만, 
피던 담뱃갑 속 은박지에 펜으로 그림을 그리거나, 

쓸모 없어진 엽서 등에 그림을 그리곤 했습니다.

 

 

 

1955년 작품 이중섭의 <투계>

 

 

 

은박지에 철이나 못 등으로 윤곽을 그리고, 

물감을 문질러서 완성한 그의 은지화 작품은 

어려운 환경에서도 죽지 않는 예술을 향한 

이중섭의 예술혼이 그대로 담겨 있습니다.

가족들의 그림을 그리며 

가족들을 그리워하는 마음은 점점 커졌습니다.

일본으로 보내놓은 부인과 아들들에게 보낸 편지화는 

현재 국립현대미술관에 소장이 되어있는데, 

 

편지화 안에는 

네 가족이 꼭 끌어안은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가족을 향한 그리움과 사랑과 

애끓는 마음이 잘 담겨있었습니다.

 

그리움이 계속되고

가족들이 한곳에 모여 살기 위해서는 

돈을 벌어야겠다고 생각한 이중섭은

막노동하면서 가진 그림들을 모으고,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서 개인 전시회를 열게 됩니다.

 

 

하지만 예상 밖으로 이중섭은 큰돈을 벌지 못하자
이중섭은 크게 상심하였고, 

지인들에게 자기 작품을 나눠주고 
일부는 태워버리기까지 했습니다.


가족들과 한곳에 모여 살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하며 

일과 그림 작업을 병행하며

열심히 준비한 개인 전시회가 기대 이하의 성과를 내자

이중섭의 삶은 급격히 안 좋아지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 후, 고된 생활고, 거식증과 간염 등으로 건강을 잃은 그는 

39세의 나이에 서울의 적십자 병원에서

쓸쓸하게 숨을 거두게 됩니다.

이중섭의 은박지 작품 세 점은 

뉴욕의 현대 미술관에

한국인 화가 작품으로는 최초로 전시되는 영광을 누리지만

이중섭은 살아 있는 동안, 그림으로 큰돈을 벌지 못하고

일과 작품활동을 병행하며 

가족을 그리워하다 쓸쓸히 죽게 되는 

안쓰러운 삶을 보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많은 대한민국 현대미술계의 초석이 되었고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주는 그림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그림을 포기하지 않고, 예술혼을 피워낸 이중섭은

그가 그린 황소와 참 많이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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