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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카미유 피사로, 햇살처럼 따사로운 그림을 그려보았습니다.

by 아옹츄 2023. 7.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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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미유 피사로는 덴마크-프랑스의 인상파이자 신인상파 화가로

1830년 7월 10일 덴마크령 서인도 제도중 하나인 

세인트 토마스 섬 *현재 미국령인 버진 아일랜드 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포르투갈계의 유대인 혈통이자 프랑스에서 섬으로 온 상인이었고

어머니는 프랑스계 유대인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죽은 삼촌의 와이프와 결혼을 하게 됩니다

유대인들의 법에 의해서 두사람의 결혼은 금지되어있었지만

둘은 끝끝내 결혼을 강행했다고 합니다

부모님의 결혼이 유대인 공동체에서 많은 논란을 일으키게 되자

몇 년 동안 피사로와 그의 형제 넷은 흑인 초등학교에 다니기도 했습니다

 

피사로가 열 두살이 되던 해에 피사로의 아버지는

피사로를 프랑스에 있는 기숙학교에 보내게 됩니다

열두살에 프랑스 파리로 나가서 도화를 익힌 피사로는 회화에 관심이 생기게 됩니다

학교를 무사히 마친 피사로는 세인트 토마스로 돌아오게 되고

아버지는 피사로에게 그림이 아닌 항만 사무원으로 일해보는게 어떻겠냐고 권유하게 됩니다

아버지의 제안을 거절하기 힘들었던 피사로는

약 오년이라는 시간동안 일을 하게 되는데,될 수 있는한 짜투리 시간을 이용하고

쉬는 시간이나 퇴근시간까지 알뜰하게 이용해서

드로잉 연습을 게을리하지 않습니다.

 

회화에 관심을 가지던 카미유 피사로는 점차 풍경화의 매력을 느끼게 되었는데

코로와 샤를 프랑수와 도비니의 풍경화에 매료된 피사로는

세인트 토마스에 살고 있던 덴마크의 예술가인 프리츠 멜비에게 영감을 받아

하고 있던 일들을 접고 본격적으로 전업 예술가의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프리츠 멜비는 피사로에게 친구이자 스승이 되었고

피사로는 가족과 직장을 떠나 베네수엘라로 떠나게 됩니다

 

1855년 파리로 다시 돌아온 피사로는

프리츠 멜비의 형제이자 화가이기도 한 안톤 멜비 의 조수로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합니다

조수 생활을 하면서도 피사로는 끊임없이 다른 예술가들의 그림에 대해 공부하고, 또 영감을 얻습니다.

 

 

 

바닷가에서 수다를 떨고 있는 두 여인 1856

 

 

 

잘레 언덕, 퐁투아즈 1867

 

 

피사로의 초기작은 파리살롱이 추구하는 '그것' 과 잘 맞아 떨어졌는데

당시 살롱의 연례 전시회는 젊은 예술가들이 대중에게 노출되어 이름을 알릴 수 있는

유일한 시장이었는데, 피사로는 이 살롱 공식 위원회의 기준과 취향을 만족 시키기 위해 피사로는

굉장히 전통적이면서도 그들이 추구하는 방식으로 작업을 했습니다.

 

그렇게 1859년 피사로의 첫 번째 그림이 살롱의 승인을 받아 전시가 되었습니다.

 

전시가 되는 기간동안 피사로의 다른 그림들은 그를 지도했었던

장 밥티스트 카미유 코로 의 영향을 받게 되는데

코로와 피사로 둘 다 자연에서 그린 시골 풍경에 대한 애정을 서로 공유했습니다

 

피사로가 야외에서 그림을 그리도록 영감을 준 코로에 의해

피사로의 그림은 외광 그림 이라고도 불렸습니다

 


 

"카미유 피사로는 오늘날 진정한 화가 중 한명입니다.

이렇게 확실한 기법은 거의 만나본 적이 없습니다."

-미술 평론가이자 작가 에밀졸라

 

 

부아쟁 입구 1872

 

피사로는 자연의 아름다움을 해치지 않고 캔버스에 그대로 표현하는것을 중요하게 생각했고

점차 그 표현방법에 대해 이해하고, 자신의 화풍에 접목시켜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파리에서 1년을 보낸 피사로는 도심을 떠나 농촌 생활의 푸근함을 그리기 위해 시골로 떠나서

시골의 풍경들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피사로는 그림같은 프랑스의 시골을 충분히 그릴만한 가치가 있는 소재라고 생각했고

농민의 황금기 였던 농장들을 그렸고, 야외에서 그린 그림들은 자신의 마음에 완벽히 들때까지

꾸준히 그리고 오랜시간 끊임없이 그렸습니다.

 

피사로는 본 것에 대해 사실적으로 그리는것에 주저함이 없었고

그런 피사로의 그림이 저속하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습니다

왜 그런 비판을 받았을까요?

그저 있는 그대로 본 것을 그렸기 때문입니다

 

그가 야외에서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발판을 마련해준 코로는 

스튜디오에서 그림을 완성하고 종종 자신이 원하는 방향에 따라 그림을 수정하기도 했지만

피사로는 야외에서 그림을 그리고, 완성하는것을 선호했고

 

이 둘의 확연한 스타일의 차이는 피사로와 사이가 자연스럽게 멀어지게 되는 계기가 됩니다.

 

Louveciennes의 Versailles로 가는 길(눈 효과) 1869

 

 

피사로는 점점 더 사실적인 스타일로 그림을 그리는것을 즐겼는데

자연스럽게 그런 그림을 그리는 젊은 예술가들과 함께 어울리게 됩니다

그들 중엔 폴 세잔, 클로드 모네, 아르망 기요민 도 있었습니다

이들이 입을 모아 말하던 불만의 공통엔 살롱의 지시가 있었습니다

 

세잔의 말년에 피사로가 날 격려해주고, 위로해준 배려를 잊지 않았다고 말했던 일화가 있을만큼

당시의 폴 세잔의 작업물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었는데

이때 피사로가 같은 에술게에 몸 담고 있으면서 겪는 어려움들에 대해 

쉽게 이해하고, 위로하며 서로 잔잔한 위안을 받기도 했습니다.

 

 

Bath Road, 런던 1897

"내 그림은 인기가 없어, 전혀...."

 

 

보불 전쟁이 1870년에서 71년 발발한 후, 덴마크 국적만 가지고 군에 입대할 수 없던 피사로는

자신들의 가족들을 런던 변두리에 있는 노우드로 옮기게 했습니다

친구인 테오도르 뒤레에게 자신의 그림은 인기가 없다며 허탈해 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러던 와중에 피사로는 런던에서 파리 미술상인 폴 뒤랑 루엘을 만나게 되는데

이때만난 폴 뒤랑 루엘은 평생에 거쳐 피사로의 작품을 판매하는데 도움을 주는 귀인이 됩니다

 

전쟁이 끝난 후, 프랑스에 있는 집으로 돌아온 피사로는

20년동안 그린 1500여점의 그림 중 런던으로 이사오며 강제로 남겨두고 간 그림 중

단 40여개만 남아있음을 확인합니다

 

좌절할 틈도 없이 피사로는 군인들의 군화를 깨끗하게 유지하기 위해 바닥 발판정도로 사용했던

자신의 그림들 중 파괴되거나 쓸 수 없을 정도로 손상된 그림들을 정리합니다.

잃어버린 그림들의 다수가 당시 피사로가 개발하던 인상파 스타일로 그려진 그림들인데

피사로는 확고한 자신의 스타일로 새롭게 그림을 그려나가기 시작합니다.

 

퐁투아즈의 풍경 1874

 

이듬해인 1874년 피사로의 그룹은 첫 번째 인상파 전시회를 열었습니다

이들의 작품들은 종교적이나 역사적, 신화적 설정을 주로 묘사한 그림들을 감상했던

당시의 비평가들에게 충격을 안겨주게 되는데

 

그 이유는, 

그들의 그림들은 전통적인 그림 스타일에 비해 너무 스케치한듯한 느낌과 불완전한 느낌이었고

작업에 엄청난 시간을 투자하고 붓 터치 한번에 몇 일, 길면 몇 주에 거쳐 그림을 그리는

전통 예술가들에 대한 모욕이라고 느껴졌다고 합니다

 

그도 그럴것이 인상파 전시회의 그림들 중 어떤 작품은 

단 한번에 그려진 작품도 있었고, 덜 마른 페인트인 상태로 출품된 그림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인상파 화가들은 사람들의 평범한 일상생활과 거리사람들의 생활하는 모습들을 그렸는데

비평가들은 이 주제들을 평범하거나, 저속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특히나 피사로의 그림은 진흙 투성이에, 어수선 하면서도 더러운 환경을 여과없이 그려냈기 때문에

평론가들은 피사로의 그림에 불평과 불만을 토해냈습니다.

 

 

Montfoucault 건초수레, 몽푸코 1879

 

1880년대에 피사로에게 예술적으로 수렁에 빠졌다고 느껴졌던 시기가 있었는데

피사로는 이 수렁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새로운 주제와 회화방법을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피사로는 어린 시절, 베네수엘라에서 보았던 시골사람들의 삶을 그리면서 초기의 주제로 돌아갔습니다

피사로는 직장이나 집에서 사람들의 삶을 '이상적으로' 보이게끔 그리지 않고

사실적인 모습들을 그리는게 피사로의 목표였습니다.

 

 

 

피사로에게 그림을 배운 피사로의 아들은 피사로에게 어린 시절부터 그림을 배우면서

아버지는 훌륭한 선생님이자 아버지였고

훌륭한 선생으로서 제자에게 결코 자신의 개성을 강요하지 않았다고 묘사했습니다

 

피사로의 밑에서 공부한 고갱은 피사로는 미래의 예술가들이 고려해야 할 힘 이라고 언급했습니다

 

 

 


 

"피사로의 작품 전체를 관찰하다보면, 극도의 예술적 의지 뿐만 아니라

본질적으론 직관적이고, 순종적인 예술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피사로의 자화상  1903

 

피사로의 노년기는

따뜻한 날씨를 제외하고는 야외에서 그림을 그릴 수 없을 정도로 안구감염에 시달렸습니다

잘 낫지않는 안구감염장애 탓에 피사로는 호텔방 창가에 앉아 야외풍경을 그리기 시작했고

피사로는 더 넓은 시야를 확보하기 위해서 종종 위층에 있는 호텔방을 선택하곤 했습니다

피사로는 프랑스의 북부를 돌아다니면서

루아에, 르아브르, 파리, 디에프의 호텔에서 그림을 그렸습니다

피사로는 1903년 파리에서 사망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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