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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이탈리아 최고의 문제작을 그린 화가, 파올로 베로네세

by 아옹츄 2022. 11.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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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올로 베로네세,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의 화가

 

 

빈틈없이 꽉 채운 구도와 화려한 색채를 사용함이 특징이었고 
베니스를 기반으로 두고 베네치아파를 대표하는 화가입니다.

가나의 혼인 잔치 (1563) 
레위 가문의 잔치 (1573)

등이 그의 작품 중에 유명한 작품으로 손꼽힙니다.

석공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본인의 이름에도 있는 베로나에서 태어나
어릴 적 미술 공부를 시작합니다.
1556년 베네치아의 학교에 입학해 

뛰어난 실력으로 인정받으면서 자신의 그림 체계를 확립했습니다. 

 

베로네제 안토니오 바딜레의 제자 겸 조수로 활동했으며
바딜레의 딸과 결혼까지 하게 됩니다.
훗날에는 조반니 프란체스코 카로토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두 사람 다 당시 베로나의 주요한 화가였습니다.
당시 유행하던 매너리즘 문화에 대해 배우고 탐구했지만, 훗날 자신만의 스타일을
확립합니다.

 


베로네세는 베로나의 교회를 위해 작품을 그렸고 산 프란체스코 델라 비냐 교회의
예배당을 위해 제단화를 그리는 일도 맡아서 그렸습니다.

1560년 미켈란젤로의 시스티나 예배당의 천장에 관해 공부하기 위해
로마로 여행을 가게 되는데, 

이로 인해 베로네세의 그림에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1562년도에서 1563년도에 그린 <가나의 혼인 잔치>
팔라디오와 공동으로 그렸으며 수도사들의 의뢰로 인해 그려지게 됩니다.
거대한 크기로 의뢰받았고 최고급 안료와 최고의 색감으로 그려져야 한다는 조건이
따라붙었습니다. 또한 가능한 많은 사람이 그려져 있으면 좋겠다는 조항도
명시되어 있었습니다. 10미터의 캔버스에 요한복음의 갈릴리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예수께서 물을 포도주로 만드신 기적을 행하는 모습을 그려 넣었습니다.

 


1573년 어느 날 그는 최후의 만찬을 주제로 대형 그림을 그려달라는 의뢰를 받게 됩니다.
커다란 캔버스 안 
베로네세는 큰 그림 속 꽉 채운 화려함과 부드러운 색채를 사용하였고
커다란 건축물을 배경으로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들을 가득 채워 넣습니다.

 


하지만 이 그림으로 인해 베로네세는 한 사건에 휘말리게 됩니다.

옛 시대의 그림 중 검열로 인해 작가가 그린 그림과는 다른 모습을 한 그림들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었을 것입니다.
성스러움을 헤친다는 이유로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상도 가림을 당한 적이 있고
그림 속 벗고 있는 모습엔 교묘하게 덧칠하거나 모자이크 칠을 했습니다.

베로네세의 그림은 이탈리아 최고의 문제작으로 불리며
종교재판까지 열리게 되었는데요


그가 재판받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재판부에 불려간 베로네세에게 판사는 

 

"당신이 그린 그림이 어딨습니까?"
"몇 명의 사람을 그려 넣었고, 왜 그렸습니까?" 

 

등을 질문합니다.
질문에서도 알 수 있듯이 베로네세는 그가 그린 그림 때문이었는데

당시의 로마 교회에서는 낮아진 교회의 권위를 살리고 높이려고 했는데
이 계획 중 하나가 바로 미술개혁이었습니다.
이에 로마교회는 예술가들에게 로마 교회가 직접 만든 가이드라인을 제시하는데
그 가이드라인의 내용은 이러합니다.

 


-성서의 내용을 정확히 따라야 한다
-미신이나 더러운 장치가 삽입 되어서는 안 된다
-직접적이고 설득력 있는 표현만을 사용해야 하며, 신앙심을 북돋아야 한다
-음욕적인 표현은 피해야 한다

 


등의 가이드라인이 존재했는데, 로마교회가 제시한 이 가이드라인만 봐도
알 수 있듯이 말인즉슨 교회의 마음에 드는, 교회의 눈높이에 드는 그림으로 
그리라는 뜻이 숨어 있었습니다.


의뢰로 그린 최후의 만찬 그림의 배경은
베네치아가 상업 도시로서 최고의 전성기를 달리고, 가장 발전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린 뒤의 건축물은 화려하고 웅장했으며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의
복식과 의복은 화려함 그 자체였습니다.

모두가 최후의 만찬 하면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작품을 떠올리겠지만
이 작품 또한 베로네세가 본인의 그림 스타일을 반영하여 그린
같은 주제의 그림이었습니다.


최후의 만찬은 예수의 수난 전날 저녁, 
예수님의 열두 제자와 함께 저녁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일어난 일을 그린 것으로
예수의 죽음을 암시하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베로네세가 의뢰받아 그린 최후의 만찬 그림에는 
앵무새를 든 어릿광대가 등장하는가 하면
베드로를 술에 취한 모습으로 그려 넣었고, 코피를 흘리는 사람도 있었으며
할베르트 라는 무기를 든 독일의 용병들도 존재했습니다.
또한 예수님의 발밑에는 고양이가 있었으며 그림 앞에는 개가 그려져 있기도 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이 성서에 존재하지 않는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최후의 만찬이라는 주제 아래 그려져 있음에 로마교회는 분노 하였고
이는 이단자들에게 빌미를 제공하게 되는 그림이 된다며 재판관은 지적합니다.
할베르트 창을 든, 로마를 위협했던 용병이 왜 그려져 있느냐는 질문에

 


베로네세는 대답합니다.

 


화가와 시인은 동등하며 그림 속의 저택이 웅장하고 크기에 그 웅장한 저택을 지키기 위해
임무를 다하는 군인을 그려 넣는 것은 당연했다

 

고 말입니다.

 

사실, 베로네세는 이전에도 비슷한 그림을 그렸지만 

그 그림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베로네세는 결국 유죄 판결받고 그림을 수정하라는 요청까지 받게 되었는데
그림 앞의 개를 삭제하고, 개 자리에 막달라 마리아의 도상을 삽입하고,
작품의 제목을 바꿔라! 라는 요청에
한 개만 하겠습니다!
그럼 최후의 만찬이라는 이름 대신에 

 

레위가의 향연 (레위 집안의 잔치) 이라고 바꾸겠습니다.


베로네세의 마지막 결정은 교회의 판결 모두를 수정하지 않은 채
제목만 수정해 그림의 모든 것들이 당연시되도록 한 것입니다.

재판받은 훗날 그는 조금 더 종교적이고 조금 덜 화려한 그림을 그리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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