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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욕망을 캔버스에 담아낸 화가, 에곤 실레

by 아옹츄 2022. 11.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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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을 캔버스에 그대로 담아낸 화가, 에곤 실레

 

 


에곤 실레는 1890년생으로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났습니다.


경제적으로 풍족한 집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여유롭고 유복하게 보냈습니다.

 

아버지는 철도 역장을 하고 있었습니다.

 

에곤 실레의 가족

 

 

 

단순히 그림이 좋아서

색연필을 가지고 놀면서 그림을 그린 아들의 그림을

불에 태워버릴 정도로

실레가 그림을 그리고 노는 것을 싫어했다고 합니다.

 

 

 

 

실레가 열다섯살이 되던 어느 날 

아버지는 결혼 전부터 앓던 매독으로 죽게 되고

그의 어머니는 아버지의 죽음에도 동요하지 않았으며, 

슬퍼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 모습에 충격을 받은 실레는

어머니에 대해 불신하게 되고

평생을 어머니와 좋지 않은 관계로 살았다고 합니다.

아버지의 죽음 이후, 

가족들은 그가 아버지와 같은 직업인

철도 관련 일하기를 원했으나
에곤은 미술 외에 다른 것에는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또한 조용하고 수줍음이 많은 것에 비해 

약간은 이상한 아이로 여겨지기도 했다고 합니다.

대신 학교에 다니던 에곤은, 

미술을 정식적으로 배운 적은 없지만

또래에 비해 월등하게 뛰어난 재능을 나타내 보였다고 합니다.

 

 

 

 


실레가 빈으로 상경하여 

빈 미술 아카데미에 입학하게 된 후

기존에 실레에게 없던 미술의 기본적인 부분들과 

테크닉 적인 요소들을 체득하게 됩니다

 


에곤은 이때 그의 스승인 

구스타프 클림트를 만나게 됩니다.

클림트는 스승을 떠나 

자신의 팬인 실레에게 많은 관심을 주며 

그림을 사주기도 했고

실레에게 후원을 해줄 만한 사람들을 소개해 주기도 합니다.

 

스승의 성공한 덕후인 에곤은 

클림트의 작품을 오마주 하기도 하고, 

 

 

분리파의 영향을 받게 되는데

분리파의 리더는 

아르누보 미술가인 구스타프 클림트였습니다. 

 

황금색을 듬뿍 쓰고 나체에 대한 묘사로 인해 

비난과 찬사를 동시에 받는 인물이었습니다.

스승 클림트의 영향도 있었겠지만 

단순히 분리파의 작업실이

미술 아카데미의 뒤편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전해집니다.

 

 

훗날 아카데미 교수가 분리파의 작품 감상을 금지 시키며 

에곤은 학교를 자퇴하게 되며

당대 예술가들과 함께 그룹을 결성하게 됩니다.

 

클림트는 1909년 비엔나 Kunstschau 에 에곤 실레의

작품 몇 개를 출품 하도록 초청을 했는데

여기서 실레는 뭉크와 얀 투롭, 빈센트 반고흐의 작품을

접하게 됩니다.

 

아카데미의 구속으로 자유로워진 실레는

인간의 모습이나 형태 뿐 아니라, 인간의 성에 대해서도

본격적으로 탐구하기 시작합니다.

 

 

 


그 후 개인전을 열어 작품을 공개하게 되는데, 

에곤의 화풍을 보고 관람객들은 충격을 받게 됩니다. 

하지만 이 작품 전시회를 통해 

에곤 실레의 평생 후원자인
평론가 아르 투어 뢰슬러와 인연이 시작되게 됩니다.

 


에곤은 미성년자인 소녀들을 그렸다는 이유로 

체포되기도 합니다.

 

 

 

실레는 자신의 성적인 욕망을 주제로서 다루며 

그림을 그려왔기 때문에

그와 누드화는 뗄수없는 관계였는데 

그의 작품 누드 모델로 활동했던 소녀 하나가 그를 고발했고 

경찰이 에곤 실레의 작업실에 들이닥쳤을 땐

 

100여점이 넘는 문제가 될만한 그림들이 존재했다고 합니다. 

 

고소 고발로 인해 감옥살이하게 되지만

에곤은 이 사건 이후에 예술가로서 

큰 충격을 받지 않았습니다.

 

당시 오스트리아 사회에 만연한 

퇴폐적인 문화와 외설 사진이나 작품들로 인해

에곤 실레의 에피소드는 그저 

작은 일로서 여겨졌기 때문이라 추측합니다.

 




그 후 실레는 그의 스튜디오 건너편에 사는

에디트에 관심을 보이게 됩니다.

 

Edith Schiele의Portrait 1917


실레는 무명 시절부터 그의 모델이 되어주며, 

그의 잡다한 일까지 수발을 들어주는 발리가 있었지만, 

무명 때부터 본인에게 헌신한 발리를 버리고

 

완벽하게 부유하진 않지만, 

중산층의 계층에 사는 에디트와 결혼을 결심하게 됩니다.

 

 

 

실레의 그림 중  <죽음과 소녀>  그림이

당시 발리와의 결별을 의미하는 그림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에곤 실레와 에디트


예술가인 실레에 대해 에디트의 집안은 반대했지만 

결국 실레는 결혼하게 됩니다.

 

하지만 결혼한 지 며칠이 지나지 않아 

오랜 시간 징집을 피해 다니던 실레는 

 

1차대전으로 인해 징집되어 

체코 프라하에서 근무하게 됩니다.

군 생활을 하면서도 실레는 자신의 전시회를 개최했고 

전쟁통에게서도 작품활동에 집중합니다.


전시회의 포스터를 기획하면서 

최후의 만찬을 오마주해

예수의 자리에 실레 본인의 초상화를 그려 넣게 되는데, 

그 까닭인지 실레의 전시회는 대성공을 거두게 되고

 

 

에곤 실레의 강렬한 선과 터치는 

한번 보면 잊지 못할 기억을 안겨주었습니다.

실레 그림의 단가가 뛰어오르게 되며,

실레에게는 대량의 주문이 밀려들게 됩니다.

 

 

그러다가 1918년도에는

유럽에서 이미 많은 환자를 발생시킨

스페인 독감이 실레가 있는 빈 까지 오게 되는데, 

스페인 독감은 20세기 최악의 질병으로서

전 세계 총 5억명이 넘는 사람을 감염시켰다고 합니다.

 

 

Schiele's Wife with Her Little Nephew 1915

 


임신 육개월 차에 접어든 아내 에디트가 

스페인 독감에 걸리게 되며 폐렴을 앓게 되고
목숨이 위태로워지면서 

 

실레는 최악의 사태를 대비해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마음의 준비를 하며 아내의 사망 전에 

<줄무늬 옷을 입은 에디트 실레의 초상> 을 그리게 되었고
이것이 바로 아내 에디트의 마지막 모습이 되게 됩니다.
결국 임산부인 아내와 배 속의 아기가 죽게 되고 

 

 

에곤 실레의 자화상

 

에곤 실레 역시 3일 뒤에 사망하게 됩니다.
그의 나이 고작 28살 때의 일입니다.

 

 

 

 

The Family 1918


에곤 실레의 대표작인 <가족> (1918) 속의

가족 구성원 모두가  스페인 독감으로 인해 사망하게 된 것입니다.

에곤 실레의 작품인 가족 속의 가족 구성원에는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도 그려 넣어져 있는데

이는 스페인 독감을 이겨내고 

모두가 행복하게 살길 바라는 실레의 바람이
그려 넣어져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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