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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스페인의 천재 건축가 안토니오 가우디

by 아옹츄 2022. 11.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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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의 천재 건축가 안토니오 가우디

 


카탈루냐 출신인 가우디는 스페인 건축학의 아버지로 불리며 
스페인 아르누보 건축 중심의 인물이기도 합니다.

그가 만든 건물 중 총 일곱 작품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습니다

 

 


1. 비센스 주택
2. 구엘 저택
3. 구엘 공장단지 내 지하경당
4. 구엘 공원
5. 카사 바트요
6. 밀라 주택
7. 성가족성당 탄생 입면 및 지하경당

 

 


1852년 가우디는 5남매 중 막내로 

주물 장인 집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어릴 때부터 몸이 좋지 않았던 가우디는 

류머티즘을 앓기도 해서

지팡이를 짚고 다녔다고 했는데, 

 

그 정도가 심해서 서 있기 조차 힘들 정도 였다고 합니다.


가우디의 바로 위의 형과의 가우디의 관계가 각별했는데

건장한 체격의 형인 가우디의 둘째 형 프란세스크는 

몸이 약한 어린 날의 가우디를

많이 업어주었다고 합니다. 

 

몸이 약해서인지 학교에 오랜 시간 있지 못하고 

집안 소유의 별장에서 쉬는 시간이 많았는데, 

가우디는 건강을 위해 자연 속에서 쉬면서

자연 속에서 많은 영감을 얻었다고 합니다.

 

 

가우디의 집
일반인들에게 오픈이 된 가우디의 집 / 욕실


가우디의 학창 시절, 성적도 뛰어난 편이 아니었고

건강이 안 좋아서 

친구들과 어울리며 어울릴 수 없었던 가우디는 

우연한 기회에 자신의 그림을 한 친구에게 보여주게 되는데

 

그 친구가 가우디의 그림을 칭찬했다고 합니다

그 친구를 통해 그림에 대한 칭찬을 들으며 

가우디는 운명처럼 건축가의 길에 들어서게 됩니다.

 

 


가우디는 바르셀로나의 건축학교에 입학하게 됩니다.


세계를 여행 다니며 

건축 양식에 대해 배울 수 있는 돈이 없던 가우디는

책을 통해서 세계의 건축 양식에 관해 

공부하고 탐구하게 됩니다.

 

가우디가 건축학교를 졸업할 때 학장은


"이 졸업장을 천재에게 주는 건지, 바보에게 주는 건지 누가 알겠나?

오직 시간만이 말해줄 것이다." 

 

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보수적 성향의 교수와 학장이 주를 이루는 건축학교에서 

건축물을 비난한다거나 하는

괴짜 행동을 했던 가우디였지만, 

그의 재능은 눈에 보였기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드디어 건축사 자격증을 딴 가우디는 

본격적으로 건축가의 길을 걷게 됩니다

개인 사무실을 오픈한 가우디는

시청 산하의 여러 가지 일을 도맡으며 

커리어를 쌓아갑니다


 


그러던 중 1878년 가우디는 

카사 비센스 를 건축하게 됩니다

 

타일공장 사장인 비센스의 별장이었습니다.

 

어릴 적부터 자연 속에서 많은 영감을 받았던 가우디는 

카사 비센스의 디자인 일체를
자연 속에서 얻은 영감으로 창조해내게 되는데

 

카사 비센스가 있는 동네에 주로 피어있는 

금잔화와 야자나무와 흙 등이 모티브가 됩니다. 

 

철책과 타일과 벽 일체 속에 

금잔화와 야자나무들이 들어가게 됩니다

균형과 조화를 이루는 당시의 건축양식과는 다르게 

둥근 곡선과 다양한 색채가 어우러진 

가우디의 데뷔작으로 가우디는 엄청난 명성을 얻게 됩니다.


카사 비센스의 내부에는 실거주자가 존재했습니다. 

한 해에 딱 하루 내부를 관람할 수 있는

날이 있고 제한적이어서 관광객들은 건물의 외부만 

관람할 수 있었습니다.

 

2017년 11월, 바르셀로나시에서 

카사 비센스의 일부를 구매하여

관광객들도 내부를 관람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1883년 구엘 가의 건축을 도맡아 하는 건축가가 됩니다
구엘의 이름이 붙은 건축물 일체를 가우디가 작업하게 된 것인데요

 

구엘은 바르셀로나 최고의 부자로 

예술과 예술가에게 돈을 아끼지 않는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구엘의 추천과 인맥으로 

가우디는 가구와 소품도 만들고 도심의 가로등이나

신문의 가판대도 만들었다고 합니다.

 

 

 

도심의 가로등 디자인 <안토니오 가우디 작품>

 

 


가우디는 당시의 주류를 이루었던 모더니즘 양식을 벗어나 
가우디 자신만의 건축양식을 고수하게 됩니다.
동물과 식물 등의 형태를 모티브 삼거나 

 

 

 

컬트 신비주의와 여러 문명을 건축양식에
접목해 탈 권위성이 강한 아르누보 예술의 특징을 선보였습니다.

 

 

 

 

 

또한 가우디 하면 

모자이크 타일을 빼놓을 수가 없는데

이는 가우디와 함께한 

조제프 마리아 주졸 이 지베르트와 함께 한 작업물이었다고 합니다.

 

 

 

 

색채 배합의 능력이 그렇게 뛰어나지 않았던 가우디와 달리

가우디의 동료인 지베르트는

색 배합 능력이 뛰어났다고 합니다.

 

 

 

 

 

 

실제 지베르트와 함께 하지 않은 작업물들엔 
오늘날 가우디의 트레이드 마크라고 생각했던 

타일 장식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설계만 하는 것이 아니라, 타일공이나 미장공 등을 

직접 골라 섭외하는 등

가우디 자신이 설계한 작업물에 함께하는 모든 과정에 

세심하게 신경을 쓰기도 하여서 

최상의 결과물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1883년 이후로 가우디가 죽는 그날까지 

성가정 대성당 (사그라다 파밀리아 대성당)

건설에 올인하다시피 하는데, 

그는 살아생전 재정문제와 여러 가지 사정으로 인해

사그라다 파밀리아 대성당이 

완공되는 모습을 보지 못하게 됩니다

가우디 자신도 성당을 완공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이야기하였습니다.

 

 

내 자신에겐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지는데

슬프게도 내 손으로 성당을 완성하지 못할 것 같다. 

내 후손들과 후대 건축가들이

성당을 완성하고 빛내주길 바란다 

 

는 말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1926년, 가우디는 미사를 마치고 돌아가던 중 
전차에 치이는 사고를 당하게 됩니다.

 

전차에 치인 가우디의 초라한 행색을 보고 

그저 거리의 노숙자로 여긴 전차 운전사는
길 한 쪽에 가우디를 버려두고 가버리게 됩니다

그런 가우디를 발견한 행인들이 가우디를 병원으로 옮기려 했으나
역시나 남루한 가우디의 행색을 발견한 

택시 기사들이 승차 거부를 하게 됩니다

계속된 승차 거부 끝에 가우디가 경찰의 도움을 받아 

병원으로 이송당하게 되지만, 병원에서마저도 노숙자로 여겨져

생사를 오락가락하는 가우디에게 기본적인 치료만 해주게 됩니다

가우디의 사고 소식을 들은 신부가 

가우디를 찾아서 병원에 방문하게 되지만

병원 한 쪽에 방치되다시피 있는 가우디를 보고 

재빨리 치료받자며 그가 가우디임을 알립니다. 

하지만 가우디는 내 겉모습을 보고 판단한 사람들에게


거지 같은 가우디가 

이런 곳에서 죽는다는 걸 보여주게 하라. 

난 가난한 사람들과

곁에 있다가 죽는 게 낫다며 치료를 거부했고 

 

73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그 후 가우디는 평생을 바쳐 완공만을 기다렸던

성가정 대성당의 지하 묘지에 안장이 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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