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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빛을 다루는 빛의 마술사, 화가 렘브란트

by 아옹츄 2022. 11.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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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의 화가 렘브란트, 

빛을 잘 쓰는 화가로도 유명해서 빛의 화가로도 불리기도 합니다

 


네덜란드 미술 역사에서뿐만 아니라 

유럽 미술에 한 획을 그은 위대한 화가로서
네덜란드 미술사의 황금시대를 불러오는데 

크게 기여한 화가입니다.

 


1606년 암스테르담 레이던에서 태어난 렘브란트는 

학교생활을 하면서도 그림을 그리는 일에 집중하는 일이 많았고, 

그 모습을 본 그의 모친이

렘브란트를 야코프 판 스바넨뷔르흐 의 제자로 

미술 수업을 받도록 합니다

1625년 개인 화실을 연 렘브란트는 

정기적으로 그림에 관한 공부를 하면서

미술에 대한 열정을 이어갔는데

개인 화실과 그림지도를 받으러 오가던 중 

결국은 암스테르담으로 거처를 옮기게 됩니다

이 시기에 외과 의사 조합의 의뢰로 

오늘날까지 명작으로 손꼽히는 그림을 그리게 되는데 

이 그림으로 초상화가로서 이름을 알리게 됩니다

이름을 알린 렘브란트에게 그 이후로 

고가의 초상화 주문이 밀려들게 되는데

초상화뿐만 아니라 판화 주문까지 밀려들기 시작합니다

 

판화도 100길더라는 비싼 가격에 팔리곤 했는데,

당시 노동자들의 넉 달 치 월급에 준하는 

100길더라는 사악한 가격임에도 불구하고

렘브란트의 판화를 원하는 주문이 

밀려있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렘브란트의 판화는

극명한 명암의 대조와 유려하고 아름다운 선으로 

유화 작품에 준하는 가격으로 팔려나갔고

비싼 수업료를 내더라도 

렘브란트에게 그림을 배우고자 하는 제자들이

엄청나게 많았다고 합니다.

 

빛을 잘 쓰고 다른 화가들과 비교해 보았을 때 

그림 속 사람들의 시선 처리가 완벽했고

주제를 묶어 표현하면서 워낙 탁월했던 렘브란트는

자신만의 스타일로

그는 그림으로 성공하고, 그림으로 

자수성가를 한 재력가가 됩니다.

연간소득이 3000길더에 달할 정도로 

그림으로 돈을 쓸어 담게 됩니다.


현 암스테르담의 명소인 렘브란트 저택을 매입하게 되는데
그 당시 부촌에 자리를 잡고 있던 렘브란트의 저택을 
그림으로 성공해 33세라는 어린 나이에 구매하게 됩니다.

 


부촌에 자리한 렘브란트 저택의 당시 가격은 13,000길더로
당시 암스테르담의 평균 집값이 

1200길더 라는 것을 생각하면 엄청난 가격의

저택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렘브란트는 선술집의 방탕아라는 그림을 그리게 되는데, 

이 그림 속에 자신과 자신의 아내를 그려 넣게 됩니다. 

그의 나이 서른넷에 그린 그림인데 이 그림 속의

렘브란트 본인의 모습은 그림으로 

성공했다는 자부심이 가득한 본인의 모습을

거침없이 표현하여 그려 넣었으며, 

그림 하단에 시그니처 사인을 그려 넣었습니다.

 

 

 

렘브란트 인생의 내리막길


그러던 어느 날, 

그림으로 네덜란드 전역에서 이름을 날린 렘브란트가 
내리막길을 걷게 되는 결정적인 사건이 발생합니다.

당시 네덜란드에는 국가를 위해 

자율적으로 모집되는 순찰대인 민병대가 있었는데

이 민병대 활동을 하는 자들은 나라를 위해 자발적으로 모였다는

사실로도 충분히 프라이드를 가지고 있었고, 

이들은 사회적으로도 영향력이 있는 집단이었습니다. 

 

자신들의 삶이나 업적을 기록하고 자긍심을 고취하기 위해

초상화를 자주 주문하기도 하였는데, 

당시 네덜란드에서 가장 유명한 화가인

렘브란트에게 자신들의 모습을 그려달라고 의뢰하게 됩니다.

 

 


그렇게 그려진 그림이 암스테르담 레이크서 미술관에 있는 
야경 (프란스 바닝 코크 대장의 민병대 / 1642년)입니다.

의뢰받아 그린 민병대 그림 속엔 인물의 모두가 살아 숨을 쉬는듯한 느낌이 생생하게
잘 담겨있고, 모두가 분주히 준비하는 그 순간을 하나하나 잘 담아내었는데

왜 렘브란트는 이 그림을 그리고 내리막길을 걷게 되었을까요?
그 시기의 화가들은 민병대의 그림을 의뢰받아 그렸을 때 
누구 하나 돋보이지 않게 그렸습니다
즉 그림 속 민병대원들 모두의 개성이 돋보이게 그려
모두가 주인공으로 보일 만큼 그려 주었다는 것 입니다.

렘브란트가 그린 민병대 그림은 자율적인 민병대의 모습을 그려내어
통일되지 않은 조직의 모습을 그린 듯 하게 보여 혹평받게 됩니다.

 

 

 

 

렘브란트의 독보적인 스타일


하지만 본인만의 스타일을 고집해오며 그림을 그려왔던 렘브란트는

민병대 그림을 그리면서도 

본인만의 스타일을 적용합니다.

이 스타일을 렘브란트 라이팅이라고 하는데, 

 


이 렘브란트 라이팅은 

연극적 조명 효과를 주어 

형태를 보다 입체적으로 보이게 하는 기법입니다.

45도 위에서 빛을 쏘아 보이는 렘브란트 라이팅을

100여점이 넘는 본인의 자화 상속에도 

계속해서 적용해 다양한 각도로 남긴 렘브란트,

다양한 조명법을 시도해보고 빛을 활용해 보기 위해 자신의 자화상을

많이 남긴 것으로 사료되었는데 

훗날 그는 근대적 명암의 시조란 이름을 듣게 되지만 

당시에 자기 작품에 있어 고집이 있었던 렘브란트는

쏟아지는 사람들의 악평에도 굴하지 않고 

그저 평론가들에게 잘 보이려는 화가들을 비판하는 풍자화까지 그려

평론가와 사람들에게 큰 비난을 받게 됩니다.

이를 계기로 렘브란트 작품에 대한 인기까지 떨어지게 되며

그가 큰돈을 벌며 처음 구매한 저택에 대한 대출까지 

온전히 상환하기 힘들어지게 된 렘브란트는 

최종 파산까지 가게 됩니다.

 

그 당시 네덜란드에서 가장 잘나갔던 화가는 

파산하게 된 것입니다.

신용 불량자가 된 렘브란트는 

그 후 그림을 그리는 족족 다 압류되게 되고
63세의 그가 그린 자화상은 힘없고 무력하고 지친 노인의 모습으로
그려져 있기도 합니다.
젊은 시절 그가 그렸던 자화상과 비교한다면 거의 절망스러운 느낌의
그림이 됩니다.

하지만 파산은 파산일 뿐! 

렘브란트는 그림에 대한 열정으로 그림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열심히 그림을 그려 그 집을 다시 사들였고, 
현재 그의 집은 미술관으로 사용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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