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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황금을 캔버스에 녹였어요, 구스타프 클림트

by 아옹츄 2022. 11.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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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의 예술가로 불리는

구스타프 클림트 


클림트는 1862년 7월 14일 오스트리아의

빈 근교인 바움가르텐에서 태어났습니다.

클림트는 오스트리아의 대표적인 
상징주의 화가이자
오스트리아 빈 분리파 운동의 중심인

인물입니다.

 

 

클림트는 귀금속 세공사 이자 조각가

그리고 판화가로 활동하던 클림트의

아버지는 성공하지 못한 까닭에

가난한 유년 시절을 보내게 됩니다.

하지만 금을 다루던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훗날 자신의 작품에도 금을 이용하여

작업을 하게 됩니다.

 

클림트는 빈에 위치한 응용 미술학교에 입학해
장식 회화가로서 정식 교육을 받았습니다.

응용 미술학교의 교육 안에서

클림트는 모자이크 기법이나 도자기 미술

금속을 다루거나 쓰는 방법

다양한 장식 기법들을 배우게 됩니다.

 

이 당시 클림트는 한스 마 카르트로 대표되는

역사화에 빠져있었는데

이 역사화는 엄청난 스케일을 가지고 있지만

그 안에 섬세함까지 담아낸 보는 이들로 하여금

감탄을 자아내는 장르였습니다.

 

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동료와 동생과 함께
공방을 만들어서 회화 작품과
벽면의 건축물 등을 제작하는 일을 맡아서 했습니다
공방에서 활동하던 당시 초기에 클림트는 
전통적이면서도 사실적인 화풍을 추구했습니다.

 

클림트가 의뢰받아 작업한 빈의 저택들엔

클림트가 빠져있던 한스 마 카르트의 스타일로

장식하였습니다.

 

하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뒤
스스로 독립된 활동을 하게 되면서 클림트 자신만의
아이덴티티가 담긴 화풍을 발전시켜 나가게 됩니다.

 

1892년 클림트의 동생인 에른스트와

아버지의 죽음으로 인해 커다란 슬픔에 빠진

클림트는 그 시기에

프랑스와 영국 등지에서 일어난
인상파와 같이 진보된 형태의 미술 운동을
접하게 됩니다.

 

이 아방가르드 운동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오스트리아 내의 보수적인 부분들과 
국외 미술에 비해 상대적으로 낙후된 부분에
반발심을 가지게 됩니다.


또한 너무나 보수적이고 권위적이었던

당시 원로들의 작품을 벗어나야겠다고 느낀

클림트는 빈 미술과 협회로부터 독립되어야겠다.

분리되어야겠다 결심을 했고

이후에 클림트는 반 아카데미즘을 운동하며
1897년 4월 3일, 빈 분리파를 결성하게 됩니다.

 

 

 

 

 

"시대에는 그 시대의 예술을,

예술에는 자유를"

 

 

 

회장인 클림트를 중심으로 공예가이자

그래픽 디자이너로서 활동했던 콜로먼 모저와,

건축가였던 오토 바그너 요제프 마리아 올브리히 등의

멤버가 결성이 되었습니다.

이들은 빈 미술가 협회에 공식적으로 통보를 한 후

그들만의 창설식을 하면서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뜻을 같이하는 멤버들은

더 이상 검열에 통과하려 노력하지 않았고,

자신이 보고 느낀 모든 것들을 화풍에 담아냅니다.

그들 스스로의 작품으로

사회의 많은 부분을 변화시키려 노력하기도 했습니다.

 

훗날 클림트의 성공한 덕후로도 불리는 클림트의 제자인

에곤 실레와 오스카 코코슈카와

칼 몰, 오토 바그너 등

당시 오스트리아를 선도하던 디자이너와

화가, 그리고 건축가들이 빈 분리파에 뜻을 같이 합니다.

 

빈 분리파의 창설 이후 클림트의 작품은

이전의 작품과 완전히 바뀌게 됩니다.

오스트리아의 빈을 중심으로 활동하며

그동안 빈이 '음악 도시' 로서 가지고 있던

도시의 이미지를 '예술가의 도시'라는

이미지도 떠올리게끔 하는 발판을 마련합니다.

 

분리파의 첫 전시회에는 5만 7천여 명의

관람객들이 방문하였고 218점의 

분리파 작품을 판매하는 엄청난 판매고를

올렸습니다. 첫 전시가 대성공을 거두고

클림트의 명성은 정점에 이르게 됩니다.

 

 

클림트의 그림은 주로 여성의 관능적인 모습과

황금빛을 띠는 화려한 색채를 특징으로 그려졌습니다.

 

앞서 말했듯이 클림트는 금을 세공하는 

아버지의 밑에서 자라면서 실제 금박을 활용해

캔버스에 황금을 입히는 방법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잘 활용했습니다.

캔버스에 아름답게 녹여진 황금빛 색채는

많은 이들을 충분히 매료시킬 만했습니다.

 

 

1907~1908년 클림트 作 <키스>

 

 

클림트는 모자이크 양식

그리고 패턴황금을 사용해

눈에 띄는 자신만의양식을 만들어냈습니다.

 

 

 

 

 

실제로 클림트의 그림이 전시된 미술관에서

클림트의 그림을 보게 되면 

그 크기와 압도적인 화려함과

강렬함에눈을 뗄 수가 없다고 합니다.

 

클림트는 아름다운 황금색 그림으로사랑받았지만,

한편으로는 성(性)에 관련한그림과

에로틱함을 그림 속에 담아냈다는 이유로

항의받기도 했습니다.

 

1900년부터 시작해 1903년에 이르기까지

빈 대학교의 대강당 천장에 그린 클림트의 그림

<철학> <의학> <법학> 은 그림 내에 담겨있는

외설스러움으로 인해 빈 대학교에 재직 중이던 교수들과 

마찰을 일으키게 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1903년 <법학> 그림이 완성되자마자

클림트의 작품이 대학과는 어울리지 않는다는이유로,

현대 미술관으로 옮길 것을 권유받습니다.

하지만 클림트는 본래의 취지에 어긋나는 일이라며

거절하게 됩니다.

이로 인해 클림트는 더 이상공공 작품을 의뢰받지 않았고

 

그의 그림체 역시 나체와 성에 대해 더욱더

대담하게 표현하게 됨으로써

대중들의 고상한 취향에서 멀어져

빈 분리파 내에서도 그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점점 사라져 갔습니다.

 

클림트는 1904년에 열린 빈 분리파 전시회에

<물뱀 ⅱ>를 출품하고 빈 분리파를떠나게 됩니다.

 

단체를 떠나 진정 홀로서기를 하게 된클림트는

개인적으로 활동하며 

자신이 그림 세계에 더욱더 몰두하게 됩니다.

 

클림트는 자신의 그림에 대해서

어떠한부연 설명도 하지 않았습니다.

작품에 대해 인터뷰도 하지 않았고

화가가 아닌 일반인 클림트의 사생활은

철저히 비밀리에 유지되었습니다.

이러한 신비주의 전략은

그가 만들어낸 작품을 더욱더 신비롭고

매력 있게보이게끔 하였습니다.

 

1918년 클림트는 뇌졸중으로 쓰러지게 됩니다.

그의 마지막엔 그가 가장 사랑하던 제자인

절친 에곤 실레도 함께 했습니다.

 

클림트의 사후부터 지금까지

전 세계의모든 사람이 그의 작품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한때는 모두가 그의 작품이 외설스러움등을 돌렸지만,

그의 사후로부터 시간이 흐른 뒤

클림트의 작품은 아름다움과 낭만을 담은작품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수수께끼 같던 그의 삶과

그의 그림은해답을 찾아가며 즐기는 재미로 즐기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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