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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 아름다운 색채의 마스터

by 아옹츄 2023. 2.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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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이 여자의 젖가슴을 창조하지 않으셨다면

나는 화가가 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Gabrielle en costume oriental 1913

 


 

 

 

프랑스의 인상주의 화가인 르누아르는

1841년 2월 리모주의 옛 생트카테린 대로

지금의 강베타 대로에서 태어났습니다.

르누아르의 아버지는 석공이었고 어머니는 직공이었습니다.

르누아르는 가난한 환경 속에서 근근히 삶을 이어가며

힘겹게 살았습니다.

 

 

르누아르의 가족사진

 

 

르누아르는 열세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도자기 공방에서 조각 장식을 배우기 위해

견습생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견습생 생활을 힘들게 이어가면서도

르누아르는 일을 마치고 야학 수업을 들으며 미술관을 다니고

데셍과 소묘를 배우는 등 그림에 대해 소홀히 하지 않고

예술에 대한 진지한 태도를 이어갔습니다.

 

르누아르는 샤를 프랑수아 구노의 음악 수업을 듣기도 했는데

오페라 파우스트와 로미오와 줄리엣을 작곡한

샤를 구노는 수업을 듣던 르누아르를

지적이고, 상당히 재능이 있는 학생이라고 평가했다고 합니다.

 

그림 뿐만 아니라 음악적으로도 재능이 있던 르누아르는

예술에 대해 누구보다 진심이었지만,

그의 힘든 환경에 등떠밀려 취업전선에 뛰어들게 됩니다.

어려운 집안 살림에 보탬이 되고자

문장조각가로 일하던 형을 통해 부채, 장롱등을 채색하는

일을 하게 됩니다.

 

훗날 산업 혁명과 도자기 공장의 기계화로

도기에 그림을 붙이는 기계가 발명이 되면서

르누아르는 하던일을 그만두고

그림을 그리는일에 본격적을 전념하게 됩니다.

 

샤를 글레르의 공방에 문하생으로 들어가게 되는데

그때 글레르의 문하생으로 있던 동문인

모네와 시슬레, 피사로를 만나 예술안에서 뜻을 같이 합니다.

 

 

르누아르가 그린 클로드 모네의 초상화

 

 

좋은 친구들을 만나 예술에 대한 의견을 공유하며

좋은 나날을 보냈지만

르누아르와 샤를 글레르의 관계는 점차 악화되었고

돌이킬 수 없는 사이가 되면서 르누아르는

그의 공방을 나오게 됩니다.

 

르누아르는 글레르를 떠나 나오면서 살롱에

자신의 처녀작을 공개합니다.

1846년에 그려낸 <춤추는 에스메랄다> 입니다.

이 작품으로 르누아르는 자신의 이름을 알리며

화려하게 데뷔를 하게 되지만

르누아르는 전시회 이후 작품이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작품을 파기 합니다.

 

이후 1865년 화실에서 만난 친구인 알프레드 시슬레의 

아버지인 윌리엄 시슬레의 초상화인

<윌리엄 시슬레의 초상> 과 지금은 

유실된 작품인 <여름날의 저녁> 이 살롱의 선택을 받게 됩니다.

 

살롱의 선택을 받았지만, 그 해 열린 살롱전에서 가장 이목을 끌고

주목을 받은건 르누아르가 아닌 마네 였습니다.

마네의 작품인 올랭피아가 많은 사람들에게 이슈가 되면서

르누아르는 입상을 하긴 했지만 사람들에겐 곧 잊혀지고 말게 됩니다.

 

그 후 제대로 칼을 갈고 준비한 르누아르가 선보인 작품은

<안토니 아주머니의 여관에서> 입니다.

 

 

안토니 아주머니의 여관에서 1866

 

 

그림 속 인물들은 르누아르의 친구인 안프레드 시슬레, 쥘 르 쾨르이고

이들이 퐁텐블로 숲 근처에 위치한 마을인 마를로테의

한 주점에 앉아있는 모습입니다.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르누아르의 화풍과는 거리감이 있는 모습입니다.

 

부드럽고 화사하면서도 코지한 색상의 르누아르의 그림이 아닌

사실적으로 묘사한 화풍이며, 색상 또한 어두운 색상들을

사용하였습니다.

 

 

본격적으로 르누아르의 이름을 알리고 살롱전에서

인정을 받기 시작한건

그의 여자친구인 리즈 트레오를 그린

<양산을 쓴 리즈> 라는 작품부터 입니다.

 

이 작품을 기점으로 르누아르의 그림에는

검은 머리의 여성인 리즈 트레오가 등장하게 됩니다.

 

르누아르는 인상주의자 화가들과 어울리며

그들과 함께 전시회를 열기도 합니다.

 

인상주의 전시회에서 르누아르의 걸작품인

<물랭 드 라 갈라트> 가 전시되고,

르누아르의 그림을 접한 모든 이들은

르누아르의 그림에 엄청난 박수와 후원을 보냅니다.

 

Bal du moulin de la Galette 1876

 

뱃놀이 일행의 오찬

 

르누아르의 그림속 사람들은 모델이 아닌 평시민들이었습니다.

르누아르의 그림은 당시 유행했던

카메라의 느낌을 그대로 살려 그렸습니다.

마치 스냅사진처럼 그림의 구도가 잘려져 있습니다

순간을 포착해내는 사진처럼

르누아르의 그림역시 순간을 포착한것처럼 그려졌습니다

물랭 드 라 갈라트 그림으로 르누아르는 일약 스타덤에 오릅니다.

 

물랭 드 라 갈라트의 그림 이후

본격적으로 르누아르가 대중성을 띈 그림을 그릴 때까지

몇 년의 시간이 흐르게 됩니다.

 

바로 이 그림으로 말입니다.

 

샤르팡티에 부인과 아이들 1879

 

르누아르의 이 그림이 살롱에 출품이 되자마자 엄청난 열풍이 붑니다

그동안 인상주의 화가들 몇몇이 모여서 출품했던

인상파 전시회와 다르게 살롱에 출품을 했다는것은

당시 프랑스 미술계의 주류에게도 인정을 받는다는 의미였는데

마이너들은 물론이고 메이저들에게도

엄청난 호평을 이끌어냅니다.

 

그림 속 주인공인 샤르팡티에 부인은

르누아르에게 경제적 지원을 아끼지 않는 후원가 중 한명이었습니다

그림을 그리는 르누아르에게 직접 모델이 되어주기도 하고

정기적으로 르누아르의 그림을 구매할 뿐만 아니라

사교계 인사들에게 르누아르를 소개시켜주기도 했습니다

르누아르의 그림실력을 알게 된 사교계 인사들은

기꺼이 르누아르의 그림을 구매하기도 했습니다.

 

 

 

폴 세잔이 자연에 포커스를 맞추어 그림을 그리는 화가였다면

르누아르는 '인간' 그 자체에 포커스를 맞추어 그림을 그렸습니다

특히나 여인들에 대한 그림을 많이 그렸는데

살집이 있고, 풍만한 여인들의 아름다운 육체에 영감을 얻어 작품을 만들어냈습니다.

 

가난하지만, 큰 탈 없이 평온한 삶을 살던 르누아르는

늘그막에 신경통으로 많은 고생을 했다고 전해집니다

 

남프랑스 카뉴에서 생을 마감하기 직전까지 작품활동에 전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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