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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한국인들이 사랑하는 시인, 윤동주

by 아옹츄 2022. 11.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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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윤동주의 쉽게 씌어진 시 중


 

 

윤동주의 생애

 

1917년 북간도에서 태어난 윤동주는 

압록강 상류 두만강 북쪽의 조선인들의 거주지역인 

북간도 명동촌에서 태어났습니다.

 

윤동주의 조부인 윤하현이 

기존 이주인들의 무리에 합류하며 
본래 척박했던 땅이었던 땅에 동방을 밝히는 곳이라는 뜻의 

동방촌 이라는 이름을 붙여 

최대 규모의 한인촌을 형성했다고 합니다.

조선 사람들이 간도로 대규모의 이주를 하게 된 배경에는,

함경도 그리고 평안도 일대에 기근이 찾아오자 

먹고 살기 힘들어졌기 때문입니다.


윤동주의 조부인 윤하현은 부농이었습니다. 

아버지 윤영석 역시 명동 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고, 

윤동주는 기독교인인 할아버지

윤하현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합니다.

어린 시절 명동 소학교에 입학한 윤동주는 같은 학교에 다니던
사촌 송몽규, 그리고 몇몇 친구들과 함께 

새명동 이라는 자체 문예지를 발간하게 됩니다.

 

 

 

 

그 후 소학교를 졸업하게 된 윤동주는 

평양 소재의 숭실중학교로 전학을 하게 되고

숭실중학교 학생회가 직접 발간한 학우지인 

숭실활천 15호에 <공상> 이라는 시를 발표하게 됩니다. 

 

이후 숭실학교의 학생들이 등불참배를 거부하는
사건이 일어나고, 숭실학교의 교장 역시 신사참배를 거부함으로 
맡고 있던 교장직에서 내려오게 되고, 
학교장은 미국으로 추방이 될 뻔하기까지에 이르게 됩니다.

 

 

두번째 줄 오른쪽부터 윤동주, 문익환

 


일련의 사건으로 인해 

숭실중학교가 무기 휴교로 폐교되면서
그의 소학교 동창이었던 문익환과 함께 

용정에 위치한 광명중학교로  편입하게 됩니다.

그는 광명중학교 졸업 후, 연희 전문학교에 입학하게 됩니다.
학교에 입학 전, 문과에 가려는 윤동주와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대립이 심각했다고 합니다.
의대나 법대를 원했던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의견과 달리
윤동주는 문과에 가고 싶어 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끝끝내 윤동주가 원하는 문과로 진학하게 됩니다.

 

윤동주는 하숙 생활을 하며 친구들과 여러 토론을 하고, 
또 종종 산책하면서 시상을 떠올리는
학교생활을 하게 됩니다. 문학을 공부하고 탐구하며 

인문학 공부와 철학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

학업에 늘 최선을 다했던 윤동주는 

연희 전문학교 재학 중이던 시기에
언어학자이신 최현배 선생이 

한국어 과목 만점을 줄 정도였고, 

다국어를 공부했으며 시를 발표해 원고료를 받기도 했습니다.
윤동주가 서울에 있던 시기에 수많은 명시가 쓰였습니다.

 

 

연희전문 문과대를 졸업한 윤동주

 

 

연희 전문학교를 무사히 졸업하게 된 윤동주는 
학문에 대한 끊임없는 열망으로 

일본으로 유학을 하게 됩니다

 

 

윤동주는 일본식 이름으로 바꾸기 전 <참회록> 이라는 시를 씁니다



파란 녹이 낀 구리 거울 속에 
내 얼굴이 남아 있는 것은
어느 왕조의 유물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까

나는 나의 참회의 글을 한줄에 줄이자
만 이십사 년 일 개월을
무슨 기쁨을 바라 살아 왔던가

내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거운 날에
나는 또 한줄의 참회록을 써야 한다
그때 그 젊은 나이에
왜 그런 부끄런 고백을 했던가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 보자

그러면 어느 운석 밑으로 홀로 걸어가는 
슬픈 사람의 뒷모양이
거울 속에 나타나온다

 


이 <참회록> 이라는 시에는

자신에 대한 성찰과 반성이 녹아 들어있고
나라를 잃게된 국민으로서의 

슬픔과 부끄러움도 그려낸 슬픈 시 입니다.

 

 

 

 



유학 생활을 하며 윤동주는 교토에서 

사촌인 송몽규와 교토에 있던

교토3고학생인 고희욱과 함께 어울리면서 

조선의 독립과 민족에 대해 열띤 논의를 했다고 합니다.

 

조선 출신의 유학생들이 모여 징병제를 이용해 

일본이 패전할 즈음

무력 봉기를 일으켜야 한다고 주장이 나온 그룹을 

일본이 가만둘 리가 없었습니다. 
특고경찰은 윤동주와 송몽규를 포함한 이들을 체포하게 됩니다. 

 

1년 7개월간의 수감생활을
힘겹게 버텨오던 윤동주는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광복을 반년 정도 앞두고 사망하게 됩니다.

윤동주의 사망 배경에 대해 많은 이야기가 있지만 
그중 하나가 생체 실험에 관련된 이야기입니다.


윤동주의 삶을 그린 영화 동주 에서도 

윤동주가 주사로 인해 사망했다고 영화 내에서 그려집니다.
영화의 끝 무렵, 송몽규와 윤동주가 맞은 주사로 
약 1800명가량이 목숨을 잃었다고도 언급이 됩니다.


또한 윤동주의 사망 후, 시신을 수습하러 온 윤영춘은 

 

"어떤 주사인지 모르겠지만 

윤동주와 나는 계속해서 주사를 맞고 있다"

 

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합니다

윤동주의 묘소는 윤동주가 태어난 곳인 북간도에 있습니다
윤동주의 가족들이 모두 북간도를 떠나서 

한국으로 돌아오며 윤동주의 묘소는 오랜 시간
제대로 된 관리 없이 방치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다 우연히 중국에 가게 된 일본인 교수에게 

가족들이 윤동주의 묘소를 찾아 달라고 부탁을 하게 되고, 

비로소 윤동주의 묘소를 발견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한국과 중국의 국교가 수립된 후
윤동주의 육촌 동생인 윤형주가 윤동주의 묘소를 찾아갔을 땐 
비석이 쓰러져있고, 풀이 무성하게 자란 후였다고 합니다. 

 

묘소를 정비하게 되면서 중국은 윤동주의 생가 입구에 

윤동주를 중국 조선족의 애국 시인 이라는 표현을 쓰게 되는데
윤동주의 국적을 중국 조선족으로 바꿔버린 것에 
현재는 외교부가 시정 요구를 한 상태입니다.

하지만 윤동주의 시 속에서도 알 수 있듯이

윤동주의 고향인 만주는 윤동주에게 그저 

'고향 멀리 떨어진 '쓸쓸한 곳' '돈을 벌러 가는 곳' 
정도로 묘사되어있고

자기 고향은 따뜻한 남쪽이라고 말하는 

자작시 고향 집에서 알 수 있습니다.


윤동주는 중국 조선족으로 시를 쓴 적이 단 한 번도 없었고

윤동주 주변인들의 증언만으로 미루어 보아도 

윤동주의 진짜 고향과 그의 정체성은

대한민국임이 확실했습니다. 

조선의 독립을 꿈꿨던 저항시인 윤동주, 
암울하고 암담한 조국의 현실을 다루고

자기 삶에 대한 고뇌와 성찰을 그려낸 윤동주의 시는

오늘날 한국의 교과서에 실려 

많은 꿈나무에게 좋은 유산으로, 문학작품으로 남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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