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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조르주 피에르 쇠라, 점점 빠져드는 '점묘법' 창시자

by 아옹츄 2023. 2.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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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르주 피에르 쇠라(George-Pierre Seurat)는

1859년 프랑스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쇠라의 아버지는 샹파뉴 출신의 법률관련 공무원이었고

쇠라의 어머니는 부유한 파리출신의 태생이었습니다

그 덕분에 쇠라는 경제적으로 부족한 없이

교육을 받으며 자랐습니다.

 

쇠라의 형제들이 이미 아버지의 뒤를 이어

법률직에 종사를 하고 있었고, 다른 형제는

상인을 경제 활동을 하고 있었기에

쇠라가 그림에 흥미를 보이며 그림 공부를 하겠다고 했을때

특별히 그림공부를 말리거나 반대하는 가족이 없었다고 합니다.

 

쇠라는 다이나믹한 일화와 격정과 때론 기행을 일삼던

예술가들과는 다른 결의

침착한 과학자 같은 화가였다고 전해집니다

항상 깔끔한 슈트 차림을 고수했고

과묵하면서도 냉철하고 이성적인 성격을 소유했다고

전해집니다.

 

 

1875년, 쇠라는 조각가인 쥐스탱 르캥과 함께 처음으로

예술에 대해 본격적으로 공부하며

예술계에 입문하게 되었습니다.

 

1878년에는 국립미술학교인 에콜 데 보자르에

정식으로 입학해 앙리 레만의 화실에 등록했습니다.

 

쇠라가 관심을 가지고 있던 화가 앵그르의 제자인

앙리 레만의 화실에 등록했지만 

쇠라는 레만의 교육에 흥미를 이어가지 못했고

도서관이나, 박물관 등을 돌아다니며 

새로운 예술 자극을 찾아다녔습니다.

 

1879년에는 1년간 병역의 의무를 수행합니다.

쇠라는 복무하는 동안 크레용과 연필로

많은 드로잉 작품을 만들어 냅니다.

 

 

 

파리에 돌아와

자신만의 작업실을 만들어 본격적으로

예술활동에 몰입하게 됩니다.

 

그 후 열심히 활동을 하지만, 

여전히 주류 예술계에서는 쇠라의 그림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쇠라가 그려 제출했던 그림들이

파리살롱에서 계속해서 거절을 당하자

쇠라는 주류에서 벗어나 독립적인 예술가들과 함께

새로운 독립예술가협회 를 결성합니다.

 

독립예술가협회를 결성한 후 쇠라는

여기서 그의 동료인 예술가 폴 시냑을 만나게 됩니다.

이때 쇠라는 자신과 같은 가치관을 공유하는 폴 시냑과 함께

점묘주의에 대한 생각을 공유하며

'점묘법' 을 만듭니다.

 

쇠라는 점묘법을 이론화 했고,

폴 시냑은 <들라크루아로부터 신인상주의 까지>라는 저서로

보급했습니다. 

 

점묘법은 팔레트에서 색을 섞어 혼합하지 않고

각 물감색을 도트로 찍어서 표현합니다.

 

 

 

점묘화로 그린 그림의 장점은 

적은 색상으로 효율적인 명암을 표현해 낼 수 있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손으로 일일이 그려야 하기 때문에 

많은 시간을 소요하게 되고, 힘이 든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207*308 / 1866년 作 그랑드 자트 섬의 일요일

 

1884년 여름, 쇠라는 그의 걸작

너비가 3m에 달하는 <그랑드 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 를 그리기 시작해

완성까지 2년이라는 긴 시간을 보냅니다.

 

그랑드 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 를 그리기 위해

쇠라는 공원에 앉아서 스케치와 예비 드로잉을 하는데

이 작업물만해도 60여점에 달할 정도로 

쇠라는 명확한 구도와 구성에 엄청난 신경을 씁니다.

 

<그랑드 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는

센강 안의 길다란 섬인 그랑드 자트에

다양한 직업군과 사회계급 구성원 남녀노소 50여명이

당시 유행했던 옷차림을 하고

공원에서 휴식하고, 또 활동하고 있는 모습을 그렸습니다.

 

배를 타면서 휴식을 취하는 인물들이 그려져 있으나

묘하게 아무런 움직임이 없어 보이는 느낌이 듭니다.

또, 가운데 있는 흰색 원피스를 입은 소녀와 옆의 여인을 빼고는

그림속 나머지 인물 모두가 호숫가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집트 회화의 영향을 받은 쇠라가

'신이 정한 질서를 따른다' 는 의미를 받아들여 그렸다고

전해집니다.

 

 

여러가지 색으로 칠해진 작은 점들이 

감상자들로 하여금 시각적으로 혼합되게 해줍니다

물감이 가지고 있던 본연의 색과는 다른 색입니다

그림을 일정한 거리를 두고 바라보면

자연스럽게 색이 혼합되어 보입니다.

쇠라의 그림은 점묘법을 활용해 최고의 빛을 화폭에 담아내었고

 

쇠라가 점묘법을 적용시켜 그린 작품들은

그림은 선으로 그려야 한다는 미술의 고정관념과 관습을 깬 작품인지라

기존 미술 작품을 감상해왔던 당시의 일반인들에게는

경악스러울 따름이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당시 새로운 미술 화풍을 기다리고 추구했던

예술가들에게는 신선한 충격이자 혁명이었습니다.

 

훗날 마티스, 칸딘스키, 피카소와 같은 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주기도 합니다.

 

 

 

 

이후 쇠라는

작업실을 클리쉬 거리 가까이로 옮겨서

젊은 모델인 마들렌 크노블로흐와 비밀리에 동거를 합니다

1890년 그녀는 쇠라의 아들을 출산했고

쇠라는 자신의 아들과 부인을 가족들에게 소개하고

이틀이 되기도 전에 독감증상을 보이다가 사망을 하게 됩니다

쇠라의 사망 원인에 대해서는 명확히 알려진 바가 없지만

폐렴이나 협심증 디프테리아 중 하나가 아닐까 하고

추정할 뿐입니다.

 

쇠라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인해

그의 마지막 작품인 서커스 는 미완성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마지막 작품인 서커스는

서커스 사이드쇼 의 배경에 있던천막 내부의 모습을 그려낸듯한 작품 입니다.

 

달리는 말 위에서 곡예를 하는 소녀를 중심으로 펼쳐진 서커스 공연과

이 공연을 보기위해 앉아서 구경하는 관객들의 모습을 그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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