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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불안과 고독은 예술의 원천, 에드바르트 뭉크

by 아옹츄 2022. 12.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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뭉크의 대표작인 <절규> 1893년도 작품 / 분류: 초상화

 

 

 

 

에드 바르트 뭉크 (Edvard Munch)

이미 전세계적으로 유명하지만

자국인 노르웨이에서는 위인으로 통하고

뭉크의 초상화가 노르웨이 지폐

1,000 노르웨이 크로네에 새겨져 있을 정도로

노르웨이를 대표하는 화가 이기도 한 뭉크

 

에드바르 뭉크는 1863년

스웨덴 노르웨이 사이 로이텐 지방의

빈민가 에서 태어났습니다.

이듬해에 뭉크의 가족은 지금의 오슬로

당시 크리스티아니아로 이주를 합니다.

 

뭉크는 어린 시절부터

어린나이에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불운한 일들이 반복되었습니다.

 

다섯살이라는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나이에

결핵에 걸린 어머니의 죽음을

그저 무기력하게 지켜볼 수 밖에 없었고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몇년 후

뭉크가 열 세살이 되던 해에

어머니처럼 따르던 뭉크의 큰누나 마저

세상을 떠나게 되면서

뭉크의 여동생은

우울증으로 인해

정신병 진단까지 받게 됩니다.

 

군의관 출신이었던 아버지는

가족들의 연이은 죽음에 충격을 받아

종교에 힘을 빌려 살아가다

점점 종교에 집착하게 되고

남은 자식들에게 마저 순종을 강요하며

광신도처럼 변질되어갔습니다.

 

뭉크 또한 어린시절부터 가족들의

연이은 죽음을 목격하고 지내오며

살아가는 내내 죽음의 공포에 대해

불안감을 안고 살아가게 됩니다.

 

뭉크는 아주 어린시절부터 

몸이 좋지않고, 병약한 스타일이어서

잦은 병으로 학교에 등교하지 못하는

날들이 많았고, 

집에 자주 머물며 우울했던 뭉크의

어린 시절을 달래주며 그가 유일하게

찾았던 탈출구와 다름 없던건

'그림' 이었습니다.

 

그림을 그리는 시간 만큼은 잠시나마

괴로운 현실을 잊을 수 있었고

견뎌낼 수 있었기에 

뭉크는 그림에 큰 애착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오슬로에 위치한 기술대학교에 들어가

기술을 배워서 엔지니어가 되기 위해

공부를 했지만, 어릴적부터 몸이 약하고

잦은 병치레로 학업에 지장이 생기자

결국 학교를 그만두고 미술에 전념해

화가가 되기로 결심하게 됩니다.

 

 

해변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는 뭉크

 

 

뭉크는 첫 파리여행 이후

이탈리아와 독일 등지를 여행하며

상징주의, 인상주의에 큰 영향을 받는데

빈센트 반 고흐와 앙리 드 툴르즈 로트레크

폴 고갱 등의 작품에 큰 영감을 받습니다.

 

이들의 작품은 뭉크에게 

자아 성찰을 하게 했고, 뭉크 내면에 존재하는

두려움과 불안함을 극복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요소였습니다.

 

이후 뭉크는 자신의 그림속에

인간의 내면속에 존재하는 심리적 묘사와

감정적인 주제들을 다뤄

심도깊에 묘사하였고

자신의 개인적 일들과 경험들을 투영해

그려내었습니다.

이렇게 탄생한 작품이 1866년 작품인

<병든 아이> 입니다.

 

어릴적부터 가족들의 연이은 죽음의

목격과, 그로인해 본인이 경험한

죽음에 대한 공포와 절망과 슬픔등을

표현해냈습니다.

뭉크의 거친 화풍에 다수의 비평가들은

경악하며 뭉크의 작품을 평가절하 했지만

뭉크는 <병든 아이> 작품이

가장 훌륭한 그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뭉크가 스물 여섯이 되던 해에

오슬로에서 연 개인전에는

110여점에 이르는작품을 선보이게 됩니다.

그 후 프랑스로 국비 유학을 떠나게 된 뭉크는

프랑스와 오슬로를 오가면서

점차 자신만의 화풍을 구축해 나갑니다.

 

 

 


 

"우리는 더이상 책을 읽는 사람이나

뜨개질하는 여인이 있는 실내 정경을 그려선 안된다.

숨을 쉬고 느끼고, 아파하고 사랑하는 

살아있는 존재를 그려야 한다."

 

 

 

 

 

죽음과 여성을 연관시켜 그려낸 1894~1895 <마돈나>

 

 

 

뭉크는 80평생 홀로 지냈습니다.

독신으로 지냈던 뭉크에게

여자가 아예 없었던것은 아닙니다.

뭉크의 불안함과 우울감이

그의 사랑에 큰 방해 요소로 작용하게 됩니다.

 

 

 

 

뭉크 1907년 <Jealousy> /캔버스에 유화

 

 

뭉크의 첫사랑은 자신의 후원자의 아내인

헤이베르그 밀로탈로 입니다.

그녀는 크로아티아 사교계의 유명인사였고

자유분방한 신여성이었다고 합니다.

그녀를 사랑하게 되었지만

뭉크는 팜므파탈이면서

여기저기서인기가 많았던 그녀를

끊임없이 의심하고, 또 집착했다고 합니다.

결국 그녀는 뭉크에게 상처를 안겨주고 떠나고

 

훗날 고향 후배인

다그니 유엘 마저 뭉크를 떠나고

 

툴라 라르센이라는

마지막 여자와 만나게 됩니다.

뭉크보다 연상이었던 그녀는

예술방면에 해박했으며

성격 또한 적극적이어서 

뭉크와 좋은 연인관계로 지냈습니다.

 

결혼을 바랬던 툴라와 달리 뭉크는

이전에 있던 사랑에 많이 다쳐

결혼을 거절하게 됩니다.

 

마지막 연인이었던

툴라와의 관계도 끝나게 되면서

뭉크는 결별 이후 과도한 음주를 하게되고

이로인해시비에 휘말리며

싸움도 많이 하게 됩니다.

불안증상은 나날이 더욱 심각해졌고

환각까지 보게 되는 지경에 이른 뭉크는

결국 병원에 가서 요양치료를 받습니다.

 

요양치료 이후 뭉크의 신경증과 불안증,

그리고 비관적인 느낌들이 많이 줄어들었고

이는 뭉크의 그림에도 나타나

밝고 다양한 색채들로

그림이 그려지게 됩니다.

색채가 밝아지게 되면서 

기존에 고수하던 작품 양식과 달라지면서

표현주의적인 요소가 많이

경감 되었습니다.

 

뭉크의 작품속에는 고독과 불안이

담겨져 있습니다.

어둡고 거친 화풍이

뭉크를 대표하는 화풍이라고 할수있습니다.

그중에서도 <절규> 라는 작품이

뭉크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많은 이들에게

절규 라는 제목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원래 제목은 <자연의 절규> 라는

제목이었다고 합니다.

스케치, 유화로 표현이 된 연작이었으며

인간의 불안함과 괴로움을

캔버스에 그대로 녹여냈다고 

찬사를 받는 작품입니다.

 

뭉크는 오슬로에서 열린 자신의 회고전이

대성공을 거두게 되면서

자신의 고국에서도 인정받게 됩니다.

 

그 후 뭉크는 자신의 거처를

노르웨이로 정하고, 오슬로 대학의

강당벽화 작업에 몰두합니다.

 

 

 

 

뭉크의 1890년 작품 <Landscape> /캔버스에 유화

 

 

뭉크의 노년에 뭉크는 

그동안 그림을 그려서 번 돈으로 

땅을 구매하게 됩니다.

오슬로 에켈리에 위치한 거대한 땅을

매입했고

 

구매한 땅에서 주로 풍경화나 자화상등을

그렸습니다. 대량의 판화 작품도 제작했으며

작품 하나가 판매되면

같은 테마로 또다른 작품을 그리는 일을

반복해 다작을 하게 되며

작품의 숫자는 해가 더해갈수록

많아졌다고 합니다.

 

 

 

 

 

 

뭉크가 70세가 되던 해에는 노르웨이 정부로부터

성 올라브 대십자 훈장을 수여 받았고

프랑스 정부로부터도 레종 도뇌르 훈장을

수여 받습니다.

 

1944년 뭉크는 몸과 마음 모두가

건강하지 못한 상태로

오슬로에 위치한 에켈리의 집에서

홀로 생을 마감합니다.

이때 뭉크의 나이 80세 입니다.

 

자신의 전 작품 모두 시에 기증해 달라는

뭉크의 유언에 따라

엄청난 양의 작품이 기증이 되는데

그 규모가 상당합니다.

 

유화 1100여점, 판화만 18000여점에 이르고

수채화와 드로잉도 4500점에 이릅니다.

조각 6점, 편지와 석판 스케치북등

합쳐 92권정도 됩니다.

 

이 작품들은 뭉크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1963년 뭉크 미술관에서 첫 선을 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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