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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러시아 추상회화의 아버지, 바실리 칸딘스키

by 아옹츄 2022. 12.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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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추상회화의 아버지로 불리는

바실리 칸딘스키는

1866년 12월 러시아 제국의 모스크바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성인 칸딘스키는 '러시아' 그중에서도

옛 수도인 '모스크바' 출신의 성씨입니다.

칸딘스키의 가족은 독일 귀족 출신이었습니다.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난 칸딘스키는 모스크바에서 태어나, 오데사로 이주해

오데사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칸딘스키는 모스크바 대학교에서 법과 경제 과목을 배웠고

전문가로서 인정받아 어린 나이에

도르파트 대학교 교수로 채용되었습니다.

 

 

칸딘스키가 서른 살이 되던 해,

인상주의 화가의 대표 격인 클로드 모네의 건초더미 시리즈를 접하게 됩니다.

 

건초더미인지도 모를 만큼 건초에 대한 묘사는 생략되고

빛에 비친 인상만이 존재했기에 그 작품을 보고 칸딘스키는 충격을 받습니다.

 

 

 

 

"그 그림이 나를 붙잡았을 뿐만 아니라

내 기억에 절대적인 영감을 주고 있다는

놀람과 혼란을 받았다

그 그림은 화려함과 동화 같은 힘을 가졌다."

 

 

 

 

물체를 구체적으로 표현하지 않아도

색채와 빛의 느낌만으로도

아름다울 수 있다는 사실에

놀라움과 감탄을 금치 못합니다.

모네의 그림은 칸딘스키의 뇌리에

깊이 새겨집니다.

 

이후 칸딘스키는

뮌헨으로 건너가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며

그림에 관한 공부를 시작합니다.

 

모델을 데생하는 방법과

스케치하는 방법

그리고 인체 해부학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칸딘스키의 초기작은 우리가 아는 칸딘스키의

그림과는 조금 다릅니다.

 

 

 

Der Blaue Reiter 1903

 

 

칸딘스키의 초기작인 '청기사'라는 작품입니다.

말을 탄 기사의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바람에 흩날리는 듯한 느낌의 터치와

두껍게 칠한 붓 터치와, 대상의 형태를 자세히

묘사하지 않은 모습과

색채로 인상만을 남긴 모습이 보입니다.

 

 

 

 

Grungasse In Murnau 1909

 

 

유럽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그림을 그리던

칸딘스키는 독일의 작은 마을인

무르나우에 머물게 됩니다.

자연을 품은 아담한 이 마을에서

영감을 받아, 자연을 캔버스에 담으며

칸딘스키는 이전 그림 화풍에서 벗어나

다양한 색채를 사용하기 시작합니다.

 

 

 

 

Autumn in murnau 1944

 

칸딘스키는 그림을 그리는 대상의 실제 크기나

색상에 구애받지 않고

대담한 배치와 과감한 색상을 썼습니다.

그리는 이가 표현하고자 하는 부분에 대해

거침없이 그려 나가겠다는 자신만의

철학을 담아 그려 나가기 시작합니다.

 

그러던 중 뜻이 맞는 동료들을 모아

예술가 모임인 청기사파를 만듭니다.

서로의 의견을 교류하며 작품을 발전시켜 나갔고

예술을 통해 서로의 내면과

영혼을 탐구하고자 했습니다.

 

 

 

 


 

"캔버스 위의 색과 형태는 작가의 내면세계를

반영합니다. 작가가 억지로 대상을 흉내 낸 그림은

내면세계와 단절됩니다."

 

"화가가 느낀 감동을 감각적으로 표현해야

보는 관객도 감동을 합니다."

 


 

 

 

 

 

칸딘스키는 자신의 내면세계에 집중해

좀 더 감각적이고 감동적인 내면을 끌어내기 위해

노력합니다.

 

색채에 대해 연구를 하며

내면을 가장 잘 표현해낼 수 있는 방식에 대해

고민하고 공부했습니다.

 

색채 연구를 거듭할수록 

칸딘스키는 그림이 표현하는 한계에 부딪히게 됩니다.

그림 속에서 색채를 아무리 다양하게 표현한다 해도

결국 자연을 묘사함에 그친다는 한계에 부딪혀

고민하던 와중에

 

음악이 자연의 소리를 흉내 내지 않고도

음악으로서 예술 그 자체가 되듯이

그림 또한 그러할 수 있다는 생각을 떠올립니다.

 

 

 

 

음악을 들으며 그림 그리는 작업을 했던 칸딘스키에게

가장 좋아하는 부분이자

거부감 없이 자기 내면을 담아내기 가장 좋은 

도구였습니다.

 

 

그림을 그리는 사람은

피아노와 악기를 연주하듯 어울리는 색을 골라 써서

영혼의 소리를 작곡한다는 느낌을 유지하며

캔버스에 옮겨 냈습니다.

 

 

Ohne Titel 1940

 

 

 

칸딘스키가 그린 불규칙한 패턴의 그림은

불규칙한 것이 아니라

소리를 색으로 표현해낸 일정한 악보의 패턴이었습니다.

 

 

 

Blue Painting 1924

 

 

칸딘스키는 구체적이었던 초기의 연작 형태에서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더 복잡한 패턴과 색을 표현해냈습니다.

형태는 사라지고 그림 구성의 틀이 남았습니다.

마치 음표를 그려 넣은 악보처럼 말입니다.

 

 

 

칸딘스키의 연작 Composition 중 여섯번째 작품 1913년

 

 

1차 세계 대전 이후 칸딘스키는 독일을 떠나

고국인 러시아로 돌아오게 됩니다.

러시아의 예술 교육과 문화에 관여하며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에 몰두했습니다.

 

 

 

1921년 칸딘스키는

바이마르 바우하우스에 교수로 초빙이 됩니다.

예술을 탐구하는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칸딘스키는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과 동시에

자신의 그림에 관한 공부와 철학을 익히는데

많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칸딘스키는 바우하우스에서 강의한 내용들을

정리해 점,선,면 이라는 책을 출간합니다.

모든 그림을 구성하는 요소인 점,선,면 만으로도

화가의 감동을 표현해낼 수 있다고 했습니다.

 

점은 간결하지만 다양한 형태로 발전 가능하고

화가가 생각하는 의미를 담아낼 수 있는 선과

각도와 무게를 남아내는 면까지

어떻게 캔버스에 그려 넣는지에 대해

상세하게 책에 적어 두었습니다.

 

 

 

 

Schwarze Linie 1924

 

 

칸딘스키는 점점 더 단순한 방식으로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흔히 아는 칸딘스키의 작품들이

이맘때쯤의 작품들입니다.

 

이후 독일에는 나치 시대가 오게 됩니다.

질서를 중요시하는 히틀러와 나치들에게

예술을 꿈꾸고, 진보적인 디자인을 하는 바우하우스는

결국 없어져야 할 리스트에 올랐고

히틀러에 의해 폐쇄가 됩니다.

 

이후 히틀러는

히틀러의 생각과 반대되는그림들을 모아

치욕적인 제목의 퇴폐미술전이라는 전시를 열었습니다.

 

전시회에 칸딘스키의 작품이 걸리게 됐고

조롱을 견딜 수 없던 칸딘스키는

파리로 이주하게 됩니다.

 

국적까지도 바꿨으나

이미 널리 조롱당한 칸딘스키의 작품은

예전의 명성만큼 더 이상 팔리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는 마지막 그 순간까지 칸딘스키는그림을 그렸습니다.

 

칸딘스키는1944년 70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알록달록한 색감과

자신만의 독특한 화풍

점, 선, 면으로 이루어져 있는 작품

단순한 형태로 구성되어 있기에 조금은 난해할 수도 있지만

현재까지도 칸딘스키의 작품은

많은 이들에게 영감과 치유를 안겨줍니다.

 

그림 치료에 이용되기도 하고

칸딘스키의 그림을 통해 작가들은 영감을 받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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